“사람 살리는 농업만큼 훌륭한 게 어디 있나요?”

<16> 임옥상 화백 ( 임옥상 미술연구소 소장)

  • 입력 2012.08.20 10:20
  • 기자명 최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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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문제는 농민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 봐요. 농촌을 살리려면 국민들이 함께 노력해야 해요. 기본적으로 농업·농사가 ‘사람 살림’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처럼 훌륭한 게 어디 있나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농촌·농민의 삶을 그려낸 임옥상 화백은 농업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 같이 밝혔다.
 
이어 “농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아요. 도시 사람들에게 의식의 혁명이랄까 단초를 농사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농업의 중요성과 미래에 대해 강조했다. 시를 쓰는 농민인 한도숙 본지 사장과 농업·농민에 애착을 갖고 활동중인 임옥상 화백이 만나 농업과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담=한도숙 본지 사장, 글=최병근·사진=김명래 기자>
 
“현실 그리지 않으면 작가윤리에 맞지 않아”
 “농업 매개로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데 일조할 것”
 
한도숙=전쟁 발발 직전에 태어나셨어요. 화백님 작품에 한국전쟁과 관련된 작품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고향인 부여도 한국전쟁의 피해가 크지 않았나요.
 
임옥상=우리 동네는 좌우 갈등은 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빨치산 활동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한국전쟁이란 비극이 저와도 무관하지 않고, 대학에 있을 동안 뜻 있는 사람들끼리 순창의 한 마을에 1년 동안 들어가서 그 동네를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미술로 표현해보자고 했어요. 당시 제가 맡은 부분이 한국전쟁 전후였었어요. 저랑 같은 해방동이인 김용석 시인과 순창 지역의 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6·25 전후의 김 씨 마을’이란 작품을 만들었죠.
 
=농촌이라는 출생의 배경, 그리고 좌우이념 대결에서 가족사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사회의식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이후 광주, 전주에서 사회전반에 대한 의식이 형성된 건가요.
 
=서울법대와 저희 미대가 맞은편에 있었어요. 박정희 유신시대 때 대학생들이 매일같이 시위를 했는데, 미대 학생이지만 너무 동조하고 싶었어요. 근데 작은 차이 때문에 시위문화가 형성이 안 되고 가위만 눌려 지냈던 거죠. 그리고 1974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룹활동을 했어요. 몇 사람이 주도했는데 저도 그중 한명이었죠. 기존 화단에서 예술은 독립된 것이라고 하면서도 정치적 일방통행을 옹호하거나, 묵언·방조, 더 나아가서는 지지했죠. 묘하게 (정치와 예술이)밀월 관계였죠. 유신정권이 들어설 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에서는 지지성명을 내고 그랬잖아요. 
▲ 임옥상 화백

 
=1980년을 지나면서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그림이 나타납니다. 화백님 그림에는 붉은 황토색이 많아요. 붉은 색은 인간 본래의 모습에서 시작하자는 의미일수도 있고, 당시 사회적분위기가 파란색으로 대변됐는데 이의 반발로서 붉은색을 쓰지 않았나 싶어요.
 
=대표님께서 미술평론가 이상이십니다.(웃음)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연을 보고 느끼는 감성이 좀 달랐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초록색이나 땅을 보면 하나하나가 마음에 꽂히거든요. 대학원 논문 쓰면서는 공부를 혼자 했어요. 내가 자라고,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그림에 담지 못하면 그림 그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을 그리지 않으면 작가로서 윤리에 맞지 않고, 어떻게 보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사회현실을 (그림에)담아야 하는데, 그건 역사와 무관하지 않고, 미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땅이 가지고 있는 포용, 절대적 생산성, 이런 것을 나타내려면, 붉은색을 죽이고 녹색을 더 많이 배치할 것 같은데, 선생님은 붉은색을 써서 강렬한 인상을 주셨어요. 현실에 대한 거부가 있었나요?
 
=현실에 대한 가감 없는 실체를 봐야 한다는 거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해도 현실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들판에서 우리가 뭘 볼 수 있겠어요. 농촌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그 무엇은 아름다운 것에 있는 게 아니에요. 가려져 있는 것에 있잖아요.
 
=80년대 초기 붉은 채색을 바탕으로 하는 유화를 하다가, 종이부조라는 형태에 한창 빠지셨어요. 그리고 소재가 달라졌어요. 종이 다음은 아크릴, 지금은 설치 미술을 하고 계십니다. 소재에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요, 이유가 있나요?
 
=말씀대로 기본생각은 변함이 없는데, 일종의 포장이 바뀌어가고 있어요. 재료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차에, 전주라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 도시 속에서 땅과 흙을 그림으로 끌고 들어오게 된 거죠. 흙을 만지면 기분이 굉장히 달라지죠. 직접 주무르면서 느끼는 감정, 몸 전체를 쓴다는 느낌이 자연스레 종이에서 흙으로 넘어가게 만든 거죠. 
 
▲ 임옥상 화백(왼쪽)과 한도숙 사장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계단에 전시된 그로잉아트 조형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화백님 말씀 듣고 나니 도화지에 두 시간 내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교육인거 같네요. 광화문에 현재 열리고 있는 ‘이제는 농사다’라는 주제의 전시기획은 누가했나요.
 
=4~5년 전에 당시 희망제작소 대표인 현 박원순 서울시장이 저에게 농업과 미술이란 주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서 강연을 했지요. 이 때 현재 쌈지농부 사장인 천호균 사장과 인연을 맺었는데 이게 씨앗이 될지 몰랐죠. 작년에 그림만 그리려고 했었죠. 근데 연말에 문득 ‘더 이상 호위호식 할 것도 없고, 내가 그림 그릴게 뭐가 더 있냐. 사람들 앞으로 나가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생각 속에 도시농업이란 말이 떠올랐어요. 도시에서 농사짓는 사람은 많잖아요. 근데 도시농업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협동조합과 도시농업을 묶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 두 개를 묶는데, 예술적으로 먼저 풀어줘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죠. 그래서 광화문이든 시청이든 도시농업을 알릴 수 있는 작품을 기획하게 된 거죠.
 
=광화문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광화문의 그로잉아트(Growing-Art)와 같은 작품들이 도시민에게 농업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 줄 것으로 봐요. 다만 도시민들이 힐끗힐끗 보고 지나가는 형태가 돼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광화문을 지나는 시민들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와 관련된 후속 작업이 있나요.
 
=다음엔 좀 더 밀착형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농업이 농민만의 것이 아니라, 상호 침투하고 국민들과 필연적으로 엮여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농촌문제는 농민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 봐요. 농촌을 살리려면 국민들이 함께 노력해야 해요. 기본적으로 농업·농사가 ‘사람 살림’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처럼 훌륭한 게 어디 있나요. 농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아요. 도시 사람들에게 의식의 혁명이랄까 단초를 농사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다음 땅 살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엔 온갖 생명으로 채워질 수 있잖아요.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농업, 농사를 매개로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화가로서 일조하고 싶어요.
▲ 임옥상, <우루과이라운드 보리고개>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우리사회의 미풍양속, 공동체의 모습, 두레, 이런 것이 협동조합이죠. 이런 것을 다 잃어버리고, 땅을 욕망의 분출구 정도로 보는 시각이 사회적으로 깊어졌어요. 이런 것을 바꿔내려면 엄청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예술가의 자부심도 있지만, 한계와 허위의식에 대해 늘 경계하고 있어요. 그림은 어디까지나 수단이고,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그림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사회를 어떻게 잘 묶어 낼 수 있느냐 이런 고민을 하는 거죠. 아마 그림만 그리고 협동조합, 도시농업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제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요즘은 미대에 입학 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그림이 부를 축재하는 수단이 되다 보니까 그런 거죠. 그런 자본주의적인 사고, 허위의식에 치우친 예술가들이 많아요. 이런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역할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농사라는 철학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요. 화백님 같은 분들이 농업에 대해 자꾸 발언을 해 주셔야 해요. 다른 계획은 없으신가요.
 
=어디까지 행보를 할지 모르는데요. 일단 제 작업의 연장선에서 봤을 때 도시농업과 협동조합을 가지고 시름한 것은 제 작업을 잘 묶어내고 자리매김한 일 중 하나입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한계상황에 도달했는데요, 이러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농업과 협동조합은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문제는 한동안 제 삶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 같아요.
 
=광화문 그로잉아트가 농업의 중요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지길 바라는데, “장난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어요. 이런 비판에 대한 고민과 장치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혼자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사회의 총량이 같이 만들어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행정가, 정치가, 예술가 등이 다 같이 계속 생각하고 토론하고 협조하고 시행착오도 거치면서 만들어 가야 할 우리시대의 과제입니다. 
 
=50년 가까이 그림을 그리셨는데요. 각 미술관에 그림이 없는 곳이 없어요. 엄청 많더군요. 화백님께서도 애정가는 작품이 있으시죠?
 
=시기별로 보면, 80년대에는 보리밭이라는 작품이 의미가 있을 것 같구요. 1990년대에는 ‘당신도 예술가’라는 주제로 일을 했는데 그 일이 기억에 남아요. 2000년대에는 분당에 책 테마파크 공원을 설계했는데, 저로서는 일반 시민들에게 설득력을 갖게 한 전시죠. 이를 집약한 작품이 상암동의 ‘하늘을 담는 그릇’인거 같아요. 지금은 광화문의 작업도 끼워 넣고 싶어요. 왜냐면 자연이 그린 그림을 사람들이 알아 봐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요.
 
=농촌에서 농사짓는 일상을 도시로 끌고 와 예술로 시도 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어요. 농민들이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 계획은 없으신가요?
 
=논에 글씨 쓰는 것을 농민들과 실질적으로 같이 해보고 싶어요. 제가 고안해서 아기자기하게 하고 싶어요. 광화문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하는 것은 작은 퍼포먼스지만, 실질적으로 농촌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이걸 장난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요.(웃음)
 
=농민들이 어렵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 해 주시죠.
 
=정말 농사짓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고, 옛날부터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은 헛되지 않아요. 땅의 뜻에 따르는 일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하고 있어요. 그걸 배우고 싶어요. 요즘은 지렁이와 텃밭 가꾸는 것이 너무 행복해요.
 
임옥상 화백은 누구?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임옥상 화백은 1970~80년대 한국 근·현대 민중미술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다. 군부독재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던 당시 예술계에 반기를 들고, 민중들과 함께하는 미술,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미술을 위해 ‘십이월전’과 ‘제3그룹’ 동인으로 활동하며 민중미술 작가 1호라는 호칭을 얻었다. 1981년 미술회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그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파헤쳐지는 농촌풍경을 그려냈다. 임 화백은 1980년대부터 부조리한 정치적 상황을 평면작품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선 90년대 부터는 소외된 계층의 현실이나 분단과 같은 시대적 화두를 다양한 설치와 입체작품으로 표현화 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종이부조에 먹으로 채색한 ‘귀로(1984)’, 캔버스에 유채물감으로 그린 ‘하수구(1982)’, 농민들의 삶을 유채로 그린 ‘보리밭(1983)’, 혼합재료로 그린 ‘우루과이라운드·보리고개(198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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