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숙제

  • 입력 2012.08.20 09:14
  • 기자명 최용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방학도 다 끝나가는 중학생 아들이 아빠와 함께 할 숙제가 있다고 했다. 공부며 숙제며 모두 아내에게 미루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무심한 내게 함께 할 숙제가 있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들어보니 얼핏 수긍이 가면서도 이상한 숙제였다. 아빠의 직업을 체험하고 그 느낌을 적어오기라는 것이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숙제였으니 요즘은 교육이 좀 달라졌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공무원이면 거길 따라가서 체험하고, 택시운전사면 옆자리에 타고 체험한다는 말인가. 직업에 따라서 체험할 수 없는 아이들도 있을 텐데 일률적으로 그런 과제를 내준다는 게 우습기도 했다. 아버지의 직업 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첨부해야 한다고 했다.

아들은 보통 남이 아빠의 직업을 물으면 소설가라고 대답한다. 당사자인 나는 결코 내 직업이 소설가라고 하지 않고 항상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어린 마음에 농사꾼보다는 소설가가 더 그럴 듯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소설가로 직업을 한다면 아들은 도저히 숙제를 하지 못할 것이었다. 어떻게 소설가라는 직업을 함께 체험하고 느낌을 적겠는가. 아들도 내 말에 수긍했고 나의 진짜 직업인 농사일을 함께 체험하기로 했다. 사실 농군의 아들이면서도 아들은 농사일을 거들어 본 적이 없다. 감자나 땅콩을 캘 때 재미삼아 호미를 잡아본 정도이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덩치가 이미 어른만 한 녀석에게 일을 시키고 싶은데 어머니가 극구 말린다. 어릴 때부터 자꾸 일을 시켜서 대학까지 나온 아들이 결국 농군이 되었다는 이상한 생각을 어머니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손자에게 일을 시킬 리가 없는 것이다.

마침 요즘 복숭아를 수확하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저녁에 아들을 시골집으로 데려왔다. 잔소리 하는 엄마가 없고 뭐든 오냐오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빽을 믿고 녀석은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열두 시도 넘어서 잠이 들었다. 방학인 요즈음 여덟 시가 넘어야 일어나는 녀석을 여섯 시도 채 안 되어 깨웠다.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래위로 붙은 우비를 입히고 밭으로 나왔다. 부모님은 일찍 일어난 손자가 기특하다면서도 일은 무슨 일이냐며 사진이나 찍으라고 했지만 체험을 해보려면 진짜 해야 한다는 완강한 내 주장에 밀려 결국 아들 녀석은 과수원으로 들어섰다. 간밤에 내린 비로 이파리들은 잔뜩 물을 머금고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주룩주룩 물이 흘렀다. 새벽에 물을 맞으면 아무리 여름이라도 선뜩하다. 복숭아는 물을 넘기면 버리게 되는 과일이라 아무리 비가 와도 시기를 놓치지 않고 따야 한다.

질척거리는 밭에, 나무에서는 물이 쏟아지지, 잠은 덜 깼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 녀석은 속으로 숙제를 하는 대신 벌점을 맞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녀석에게 할 일을 주었다. 복숭아를 따려면 사다리를 들고 다녀야 하는데 낮은 곳에 있는 복숭아를 따다 보면 사다리와 멀리 떨어지기 일쑤다. 그러면 다시 사다리를 가지고 와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일의 능률을 많이 잡아먹는다. 아들이 할 일은 세 사람의 사다리를 계속 가깝게 옮겨주는 일이었다. 복숭아를 따본 경험이 전혀 없는 아들에게 따라고 하면 복숭아에 상처를 낼 게 뻔했고 올해 복숭아 값이 괜찮은 편이라 하나라도 못 쓰게 되면 큰 손해인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시킨 일이 아주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세 사람의 사다리를 계속 옮겨주려면 쉴 짬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 많이 수확하는 게 아니어서 점심참도 안 되어 포장작업까지 끝냈다. 끝까지 곁에서 도운 손자가 기특해 할머니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고 녀석은 또 입이 벌어졌다. 나도 아들과 처음 해본 한 나절 일이 어쩐지 흔쾌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