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한담

  • 입력 2012.07.30 15:33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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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폭염이 계속되는 날, 친한 작가들 몇이 가까운 월악산의 송계 계곡에 모였다는 소식이 왔다. 다른 일을 보고 모인 터라 거의 네 시가 넘은 시간에 도착했단다. 굳이 먼 발걸음을 하여 사람을 만나지는 않더라도 찾아오는 벗은 몹시도 반기는 터라, 서둘러 계곡으로 차를 몰았다.

30분 남짓 걸려 도착해보니 너럭바위에 음식을 펼쳐놓고 술잔이 돌고 있었다. 모두들 도시에서 살다가 물소리 청청한 계곡에 왔으니 흥겹기만 한 모양이었다. 나도 올 들어 처음 찾은 계곡이었다. 모인 사람은 나까지 열 명, 모르는 얼굴도 서넛 있었으나 다들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계곡에는 우리뿐이었다. 허긴 월악산은 국립공원임에도 한적한 곳이다. 나들이 철이 아니면 주중에는 거의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경치와 물소리에 취해 술잔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술자리로는 이를 데 없이 좋은 자리이자 사람들인데 차를 가져왔으니 술을 입에 댈 수 없는 탓이었다.

나는 내심 그들이 민박집이라도 잡아 하룻밤을 묵을 거라고 짐작을 하고 함께 일박을 할 생각이었는데,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아홉 시 쯤에 서울로 출발을 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혼자 떨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운전자들을 빼고 다들 즐거운 술자리를 이어갔다.

최근에 책을 펴낸 두 명의 작가로부터 책을 선물 받고 즉석에서 시를 낭송하는 등 글쟁이들이 모인 술자리는 재미있었다. 그리고 채 30분도 되지 않아서 나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술을 마시고 내 차는 놓아둔 채 서울로 가는 차를 얻어 타고 시내까지 가면 되지 않는가.

아이들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버스를 타고 다시 계곡으로 와 차를 가지고 가면 된다. 나는 왜 진즉에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한탄하며 술잔을 받았다. 나의 방안을 들은 동료들도 한결같이 기뻐하며 내 잔에 술을 가득 가득 따라주는 것이었다.

기분 좋게 술기운이 오르고 계곡에 어둠이 내리는데 늘 진지한 늙은 총각 시인이 문득 올해 대선 이야기를 꺼냈다. 요컨대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냐를 놓고 미니 여론조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썩 당기는 건 아니었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소위 진보적인 작가라는 무리들이 술자리 안주거리로나마 이야기해야 할 주제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시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내가 제일 먼저 발언을 해야 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대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도지사를 사퇴한 김 모씨가 유력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내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새누리당의 박 후보를 꺾을 수 있는 카드가 그임을 꽤 장황하게 설명했다. 처음에 뜨악하게 바라보던 사람들 몇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데 신이 나서 마치 그를 위한 운동원처럼 나름 일장 설을 풀었다.

물론 술기운에 들떠서였다. 그리고 저마다 예측과 예언을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유일한 여자 후보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대통령이 된다면 더 이상 끔찍할 수 없다며 치를 떨기도 했다. 어떤 이는 역사를 들어가며, 어떤 이는 그녀의 개인적인 흠결을 들어가며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로 박수를 쳐대고 홍소를 터뜨리며 펼쳐진 글쟁이들의 미니 여론조사에서 그녀는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주관적이고 희망이 섞인 이야기들이었지만 나는 희미한 빛줄기를 보는 듯했다. 사람은 평생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는데, 아주 끔찍한 일은 사실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열 명의 사람이 동시에 끔찍한 일을 겪을 가능성은 더욱 낮을 것이다. 그렇다, 아주 끔찍한 일은 지난 대선으로 충분했다. 연거푸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는 생각이 술기운을 타고 희열처럼 번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두워진 계곡에서 나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결국 열 시까지 대취하여 월악산을 빠져나왔다. 여름이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뭉치자는 허황한 약속을 두고 벗들은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차로 가면 삼십 분 거리를 한 시간 반이나 시내버스를 타고 계곡으로 갔다. 꽤 마셨는데 머릿속은 계곡처럼 맑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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