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풍의 운동가- 화성의 오익선

  • 입력 2012.07.30 09:39
  • 기자명 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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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웠던 청년 시절 오익선은 1936년 생, 올해 우리 나이로 77세다. 여든이 가깝지만 건강은 별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정말 보기 드물게 큰 키였다. 186cm라니, 지금도 큰 키지만 예전에는 거의 보기 드문 거인에 속했단다. 키가 너무 커서 군대도 가지 못했다. 상당히 준수했을 용모와 더불어 지금 같으면 축복에 속했을 큰 키는 사는 동안 내내 불리하게 작용했다.

5.16 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은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들을 거의 범법자 수준으로 여겨서 각종 불이익을 주기가 일쑤였다. 합당한 이유로 면제받은 사람까지 공직에서 몰아내는 판이었으니 오익선은 공직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에서도 적잖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오익선이 태어난 발안은 땅이 비옥하고 저수지의 물이 마르지 않아 가뭄을 모르던 천혜의 농토였다. 그런 고향에서 오익선은 6대째 이어져 살고 있던 집에서 태어났다. 8,000여 평의 농지를 가진 중농 이상의 재산과 대대로 지역의 토반으로 살아왔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그리 보수적이지 않았다. 오익선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때부터 마을의 청년들과 4H운동을 같이 하며 마을 일에 관심을 가졌다. 서울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오익선은 당시 유행하던 정치가들의 강연회에 열심히 쫓아다녔다. 유력한 야당의 지도자들이던 전진한, 조봉암, 조병옥 등의 강연을 들으며 오익선의 의식은 급격하게 자라났고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올바른 정치가가 되어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청년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대대로 살아온 화성군을 구석구석 잘 알고 뛰어난 정치의식으로 무장한 오익선은 단숨에 화성군의 젊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화성군 당의 선전부장, 조직부장 등을 역임하며 선거를 지휘할 정도였다. 전도가 양양하던 청년 정치인의 삶을 뒤바꿔놓은 계기는 5.16군사 쿠데타였다. 쿠데타 이후 오익선은 정치정화법에 묶여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다. 그리고 곧이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정치를 한다고 밤낮없이 뛰어다니고 경찰에 쫓길 때도 항상 말없이 그를 응원하던 아버지였다. 오익선은 삼년상을 치르기로 했다. 이미 당시에도 삼년상을 치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유교적 가르침이 몸에 밴 오익선에게는 당연하였다. 정치정화법과 삼년상에 묶여 지내는 기간은 오익선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오익선은 자신이 할 일은 정치가 아니라 농민운동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동안 모아두었던 정치 관련 자료 두 가마니를 아궁이에 넣었다. 농민운동의 길로 오익선이 가톨릭에 입교한 것은 1958년 결혼 직후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의 권유도 있었고 두 살 위의 고종사촌 형이 신부였기 때문에 가톨릭에 호의적이었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지역에서 농민운동을 해나가던 때, 가톨릭에서는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가 막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농촌청년부가 있었다. 오익선은 농촌청년부에 참여하면서 이길재 등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1966년 가노청 산하의 농촌청년부가 독립하여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로 탄생하는데 한 몫을 하게 된다.

구미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개명과 회원 연령 제한 철폐, 농정활동의 강화 등이 결의되었다. 그는 해박한 정치의식과 현장 경험을 토대로 각 지역을 다니며 강사로 활약했다. “언제였던가? 농민들이 강제 출자에 대해 묻는 거야. 비료를 사려면 강제로 출자를 해야 하고, 출자를 안 하면 비료를 안 주니 어떡해야 하느냐고. 그 때만해도 농민들이 농업정책의 구조를 모르니까. 자, 비료는 농협에서 팔지만 그 권한은 면 산업계에 있다, 그러니까 면에 가서 전표를 끊어라, 전표를 끊어주지 않으면 출하지시서를 달라고 해라, 그러면 출자 없이도 비료를 살 수 있다. 이렇게 가르쳐줬어. 이렇게 농정을 정확히 알고 따지면 농협에서 꼼짝 못하지.”

오익선 선생은 “농촌에 관심이 있고 농촌을 살리고자 한다면 열 명 중에 한 사람을 농촌으로 내려보내라”고 강조한다

 

오익선은 이길재를 이어 4대 가농 회장을 맡았다. 그 기간에 제일 기억나는 일은 쌀 생산비 조사활동이다. “그 때 독일에서 300만원인가 지원을 받았어요. 난 꽤 큰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사사업이라는 게 쉽지 않은 것이더구만요. 어쨌든 농민들 노동력과 기계비 등을 다 따져서 생산비를 조사했는데, 난리가 났지. 중앙정보부에서 와서 어떻게 조사를 했느냐고 꼬치꼬치 묻는데, 우리는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조사방식 그대로 했다, 그렇게 나갔지. 그런데 웃기는 건 우리가 조사해놓은 통계를 학자들이 한 이십 년을 그대로 써먹더구만. 해마다 인플레 되는 거 좀 더해서 계속 울궈먹는 거예요.”

오익선은 농민이 제대로 사는 길을 협동조합운동에서 찾았다. 정치투쟁은 정치투쟁대로 중요하지만 농민들의 생활 기반은 협동조합으로 나아가야한다고 믿었다. 양계와 잠업, 신용협동조합, 소비자생협운동까지 그는 초기 협동조합운동의 산 증인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농민교육에 매달렸다. 독일에서 지원받아 농민교육기관을 세우고 8년 간을 교육에 힘썼다. 60명이 먹고 잘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었다.

잠사업에 관한 교육은 경기도에서 위탁 교육을 할 정도로 전문적이고 성공적이었다. 후원금을 댄 독일에서 와서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지원을 더욱 확대할 테니 누에고치뿐 아니라 비단을 가공하여 의류나 패션업까지 진출해보라는 권고를 해왔다. 세계 패션을 리드하는 이탈리아와 연결하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사업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박정희 유신정권과 밀착한 주교의 방해로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농민운동가로 미운 털이 박힌 오익선에게 그런 기회를 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에 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하면서도 곡절이 많았다. 아직 신협에 대해 잘 몰랐던 시절, 창립 발기인 30명을 모으기도 힘이 들었다. 가족들을 총동원하여 겨우 신협을 결성하고 몇 개월이 지났다. 회원 중 한 명이 병에 걸려 급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당시 약관에 그런 경우 20만원을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기금이라곤 겨우 30만원이 모였을 뿐인 초창기였다. 그래도 20만원을 빼 병원에 입원시켰고 병이 나은 조합원 소식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 일은 큰 홍보효과가 되어 빠르게 조합원이 늘어갔고 신협이 탄탄하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신협은 지금 540억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신협을 통해서 농민교육을 많이 했어요. 조합원 번호 500번 안에 드는 사람들은 일박 이일, 그 중에 또 뽑아서 삼박 사일씩 교육을 했어요. 그 사람들은 정말 뭐랄까, 아주 신념을 가진 멤버들이 되었지요.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면 주로 500번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요.”

그 다음에 오익선을 사로잡은 고민은 판매 문제였다. 농산물이 제대로 유통돼야한다는 그의 생각은 소비자조합으로 무르익었다. 세계적인 생협운동가인 일본의 노무라 유키코를 만나 배우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한 사람 역시 오익선이었다. 안양에서 ‘안양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라는 최초의 생협 간판이 내걸린 것이었다. 현재 오익선의 아들이 일하고 있는 ‘안양바른생협’이 바로 그 때 생긴 생협으로 현재 8,600세대가 회원으로 있다고 한다. 신협 중앙회 차원에서 소비자조합운동이 전개되자 오익선은 다시 생산자조합운동으로 돌아간다. 자신은 어디까지 생산자라는 마음이었다. 일찍부터 유기농에 대한 생각이 깊었던 그는 농산물 가공에 관심을 가지고 바른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조합을 결성해나갔다.

“내가 그 때 생각했던 게 우리나라 전통 음료인 식혜를 음료수를 만들려는 거였어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때였는데 나중에 진짜로 대기업에서 제품으로 나와서 히트쳤잖아요. 아무튼 생산과 유통, 신용사업까지 협동조합운동이 농민들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농촌을 살리는 길 재미있는 비사도 들려주었다.

 오익선은 1974년쯤에 농지를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스라엘의 예가 그런 것인데 효과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워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국유화된 농장 시스템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 때 정부부처의 고위직에 있던 이가, 이스라엘을 본받은 그런 구상을 정부에서 했다가 두 가지 이유로 포기했다고 했다.

첫째는 농지를 사들이는 데 필요한 300조 원 정도의 자금과 둘째, 미국의 눈치 때문이었다. 국유화를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식하는 미국 때문에 추진할 수가 없었다는 얘기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그런 논의가 있었다니 조금 놀라웠다. 농민운동의 사건이나 재판 현장을 빠지지 않고 다닌 일화도 숱하게 많았다. “춘천 사건 때였지. 안동 어느 대학 기숙사에서 연수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다음날 재판이 열린다고 해서 38명이 기차를 타고 원주로 가서 다시 버스로 춘천으로 갔어요. 그런데 낯선 사람 둘이 있단 말이야. 너희들 누구냐고 따져 물었더니 우리를 감시하려고 따라붙은 기관원이었어요. 어쨌든 다음날 법원으로 갔는데 우리를 들여보내지도 않는 거예요. 그런데 서른여덟 명이 으싸으싸 법원 철문을 밀어댔더니 쇠기둥이 그냥 넘어가드만. 젊었을 때고 힘도 좋았으니까. 거기서 서경원이는 호송차 밑에 드러눕고, 농민가 부르면서 죽기살기로 대드니까 경찰도 덤비지 못하더라고.”

그 시절을 떠올리는 오익선의 얼굴이 감회에 젖은 듯 아득해보였다. 오익선은 1994년 이후에 거의 운동 일선에서 물러났다. 끊임없이 교육을 다니던 것도 그 무렵부터 쉬었다. 울릉도만 빼고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농민교육을 다닌 그였다. 신협 중앙회 연수원에서는 3년 동안 전임 강사로 가르치기도 했다. 물론 유기농 쌀 생산과 가공을 2005년까지 계속하긴 했지만, 그는 일선에서 농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자립을 돕는 교육활동이 무엇보다 중요한 필생의 업이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시종 따뜻한 음성이던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이명박은 정권을 누가 잡던지 반드시 감옥으로 보내야 돼요. 그게 안 되면 난 열 명이 됐든 백 명이 됐든 사람을 모아서 투쟁에 나설 거예요. 그리고 박근혜가 누른 밥을 먹어봤어요? 옷이 없어 헐벗어봤어요? 애초에 대통령 꿈을 꾸는 게 잘못된 거지요. 자기 아버지 시절을 반성하고 자숙하는 삶을 살아야지요.” 몇 년 전까지도 가끔씩 대학생이나 젊은이들에게 강연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오익선은 당부했다. “농촌에 관심이 있고 농촌을 살리고자 한다면 열 명 중에 한 사람을 농촌으로 내려 보내라. 나머지 아홉 명이 돈을 벌어 십시일반으로 그 사람이 자리 잡을 때까지 지원해주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다. 자기가 지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농촌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되고 소비자운동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이 성공하면 다른 사람도 또 귀농을 하고, 이런 식으로 순환되면 농촌을 살릴 수 있다.”

이제는 600평 정도 텃밭 농사를 지으며 고전과 붓글씨를 쓰는 오익선에게 농촌과 농민은 여전히 뜨거운 애정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옛 시대의 참 선비가 지녔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잘 자란 오남매는 아버지가 외로울까 거의 날마다 찾아온다. 함께 살자는 말에는 오익선이 먼저 손 사레를 친다. 손수 밥을 끓일 힘이 있는 한 자식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 깨끗하고 꼿꼿하게 노년을 견디는 힘, 그것은 후회 없는 삶을 산 사람만이 간직한 높고 부러운 힘이었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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