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와 연민

  • 입력 2012.05.14 11:37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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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다보니 집안일이나 농사에 대해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아버지는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여러 모로 예술적인 감성이 있는 분이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젊었을 때 혼자 배웠다는 기타로 수준급의 연주를 하기도 한다.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도 거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흔 중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아내는 모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넷이 일을 하면서 옛날이야기가 나오면 서로의 기억 속에 들어있는 게 비슷해서 누구도 소외(?)받지 않는 즐거운 대화가 오가곤 한다. 고향마을에서 살던 추억담은 거듭 되풀이해도 물리지 않는 주제이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깊은 단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정치나 사회문제를 입에 올릴 때이다. 뿌리 깊은 반공의식이야 시대의 한계와 의식을 깨우칠만한 계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지만, 아버지가 평소 입에 담지 않는 거친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듣기가 괴롭다. 이념도 아니고 신념도 아닌, 그저 증오에 찬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불쌍하다. 반공이라는 허위의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둘로 나누어 일방적으로 한 편을 매도하는 아버지는 정신적인 불구를 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위정자들의 선전과 조선일보류의 파시스트들이 아버지를 불구로 만든 것이다. 전에는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요즘은 잠자코 혼자 열을 내시다가 사그라지기를 기다린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대해 더 너그러워지고 타인을 이해하는 품이 넓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다만 슬플 뿐이다.

비단 아버지뿐 아니다. 때로 나이든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인간적인 절망에 빠진 적이 여러 번이었다. 어제, 어깨가 아파서 면소재지에 있는 병원에 침을 맞으러 갔었다. 값이 싸고 용하다는 소문에 병원은 늘 북적인다. 차례를 기다리느라 삼, 사십 분을 앉아 있으며 세 명의 노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중 한 분은 같은 복숭아작목반이어서 인사도 드린 터였다. 그런데 평생 농사만 지어온 분들이 실로 거친 증오를 내뿜는 것이었다. 요컨대, 박근혜에 대항하여 출마 선언을 한 새누리당의 몇몇 인사들에 대한 난도질이었다. 죽일 놈 살릴 놈은 예사고 글로 옮기기 민망한 욕설이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기다리는 아주머니들이나 간호원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리고 자신들이 박근혜의 처삼촌이나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말 한 마디 나누어 본 적 없을 이재오나 김문수, 임태희 같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맹렬한 증오를 터뜨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아연한 기분이었다. 대화가 야당 쪽으로 나가자 거침없이 ‘빨갱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단어가 바로 ‘빨갱이’라는 말이다. 친일파라는 말도 매국노라는 말도 이 피투성이 단어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과는 절대 마음을 열고 대하지 못한다.

끔찍했다. 그 노인들에게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의 길을 막는 모두가 사지를 찢을(글로 옮기기 민망했던 어느 노인의 표현) 인간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실로 서글프고 초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주위에서 그런 노인들을 아주 많이 보았다. 거의 대다수라 할 정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이가 들어 삶이 깊어지는 대신 더욱 편협해지고 증오가 늘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이 문제를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 모듬살이가 사라진 데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짐작을 한다. 함께 어울려 살던 옛 마을에서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자신에 대한 돌아봄이 기본 원리로 작동하였다. 그런 모듬살이가 깨져버리면 인간은 잘못된 에고의 늪에 갇히고 타인에 대한 증오를 키우게 된다. 결국 자본과 개발이 인간의 심성을 망가뜨린 것이다.

장강의 뒷 물결은 결국 앞 물결을 밀어낸다. 나를 포함한 추한 앞 물결이 후손들의 뒷 물결에 섞일까 두렵다. 부디 내 자식들이 살 세상에는 증오하는 아버지와 연민하는 자식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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