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수 없는 꿈 - 춘천의 유남선

  • 입력 2012.03.12 10:25
  • 기자명 소설가 최용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연재 역사와 함께 인물과 함께 ①

그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그만둔 게 아니라 아예 농사를 지은 적이 없었다. 물론 농사를 짓는 집에서 태어나 농사의 힘겨움과 가난을 뼈에 사무치게 겪긴 했지만 스스로 농사를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강원 지역 농민운동을 말할 때 첫 손가락으로 꼽는 농민운동가다. 강원 지역뿐 아니라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초창기부터 그의 이름은 전국적이었다. 농민운동 사상 처음으로 구속되어 무려 징역 10년을 구형 받았던 사람, 그의 이름은 유남선이다.

올해 나이 66세, 작달막한 키에 세월의 풍파가 스치고 지나간 그의 얼굴엔 주름이 깊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차람이었지만, 여느 농부가 시내 결혼식장이라도 다니러 온 것 같이 그에게는 어딘지 평생 농사를 지은 사람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낮은 목소리로 지나온 삶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동안 설핏설핏 눈가에 물기가 비친다고 느낀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야 말았다. 그 두 가지 성격이 오늘의 유남선을 설명해준다. 춘천에서 60여리나 떨어진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중학교부터 고학으로 대학까지 마친 것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운동에 뛰어든 이래 변하지 않고 살아온 이력이 그러하다.

유남선이 처음으로 사회현실에 눈을 뜬 것은 강원대학교에 입학하여 거멀못이라는 모임을 알고부터였다. 일종의 대학 동아리였던 거멀못은 유남선을 비롯하여 정성헌, 최열, 정재돈, 최윤, 유경선 등 강원 지역의 유수한 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거멀못이란 나무 건축을 할 때 나무와 나무를 이어주는 ㄷ자 모양의 못이다. 하늘과 땅, 농촌과 도시,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다. 거멀못은 창립 당시 춘천지역의 20대 초반 대학생들로 구성되었고 각종 세미나, 농장 경영, 도서관 운영, 3선 개헌반대투쟁, 교련반대투쟁 등에 앞장서면서 춘천지역 학생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후 학생운동의 차원을 넘어 야학운동과 서점운동, 그리고 가톨릭농민회 춘천교구연합회 결성 등을 통해 사회운동세력으로 성장해나갔다.

거멀못에서 사회현실에 눈을 뜬 유남선은 군대를 제대하고 첫 번째 직장을 학원에서 시작하였다. 73년도에 이미 결혼을 하여 큰 아들이 태어난 후였다. 학원에서 국사와 사회를 가르치는 인기 있는 강사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거멀못의 선배인 정성헌이 농민운동에 뛰어들 것을 권유해왔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결정이었지만 유남선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학원 강사로 평생을 살기에는 이미 유남선은 이 사회에 대해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의에 대해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또한 그를 학원에만 매달리지 못하게 했다.

농민운동에 뛰어들자마자 그는 열정적으로 몸을 던졌다. 낮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원주, 홍천, 거진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을 만나 조직하느라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 젊음과 열정 때문이었을까, 학원 경리 아가씨에게 수시로 가불을 해서 돌아다니면서도 피곤한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여러 사람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모여 마침내 1977년 11월 <가톨릭농민회 춘천교구 지구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유남선은 연합회장 직을 맡았다.

춘천교구 가톨릭 농민회 사건

1978년 2월 2일, 유남선은 일단의 형사들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 전 해 12월에 제작한 4페이지짜리 유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을 받았다. 수사는 매질부터 시작하였다. 몽둥이와 발길질, 주먹이 정신없이 유남선의 몸에 떨어졌다. 유인물을 통해 학생 데모를 선동했다는 진술을 강요하였으나, 유남선은 사실을 사실대로 밝힌 것뿐이라며 버텨나갔다. 실제로 유인물은 불과 30여 부가 인쇄되어 평소에 친분이 있거나 농민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부했던 정도였다.

혐의를 부인하자 구타와 고문의 강도는 더해지고, 3월 20일에 풀려났을 때는 제대로 걷거나 앉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가톨릭농민회 전국본부 부장이자, 유남선에게 농민운동을 권유했던 정성헌도 역시 연행되어 혹독한 심문을 당했다.

그쯤에서 사건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경찰은 4월 6일에 유남선 회장을, 그리고 사흘 후에 정성헌 부장을 전격 연행하여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하고 말았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가톨릭농민회가 정치적 반대세력으로 점점 커지니까, 박정희정권이 본때를 보이려고 했던 거지요. 사실 유인물의 내용 자체는 농업문제와 농협의 잘못된 구조와 비리에 대한 내용이 주였고, 농민회 소개, 그리고 노동자 문제와 학원가 시위를 간략하게 언급한 게 전부였어요. 구속이 될 만한 사유도 아닌데다가 중형을 받을 사건은 더욱 아니었죠. 가톨릭농민회에 국가전복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해 일으킨 정치 탄압이었어요.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가농은 더욱 정치투쟁으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두 사람이 구속되자, 가농에서는 즉시 석방투쟁에 돌입하였다. 춘천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천주교회에서 이들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당국은 석방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던 춘천교구연합의 부회장 박명근까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함으로써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재판 과정에서 웃지 못 할 일이 생기기도 했다. 검사는 논고에서 피고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천주교 전체를 상대하기에는 정권의 부담이 컸으므로 이들을 비신자로 매도하여 이간하려는 목적이었다. 심문과정에서 성호를 긋지 않았다는 황당한 이유를 대며 교회를 단지 은신처로 사용하는 불순분자라는 딱지를 붙이려고 했다. 이에 유남선은 검사 앞에서 성호를 그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항변했으며, 춘천교구장 박토마 신부는 서한을 통해 이들이야말로 진실한 천주교 신자요, 교우라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가톨릭신앙 속에서 농민운동은 당연하다, 하느님의 사업, 예수님의 삶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게 농민운동, 노동운동, 도시빈민운동이다, 이런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에 당당하게 내 소신을 밝혔어요. 운동가와 신도, 현장과 교회를 이간시키려는 억지가 분명히 보이는 재판이었지요.”

세 사람의 구속자는 끝까지 검사의 논고에 불복하여 항의했지만, 이미 정권의 시녀가 된 사법부는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하였다. 검사는 징역 10년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엄청난 형량이었다. 분노한 회원들과 친지들은 법원 정문을 열고 호송차 앞에 드러누워 농성을 하는 등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후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유남선과 정성헌은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아 복역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가톨릭농민회의 운동이 전면적인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고 이듬해 벌어지는 안동교구의 오원춘 사건을 예고한 사건이기도 했다. 사건의 여파는 춘천가농 회원들의 삶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당국의 거짓 선전과 무섭게 몰아닥친 압력으로 회원 모두가 심각한 가정불화에 휩싸였다. 부자간에, 형제간에, 심지어 부부간에도 심각한 싸움이 벌어졌다. 사실 그것은 당국의 탄압보다 더한 고통이어서, 나중에 세월이 흐르고 난 후 하나같이 가족 간의 불화가 제일 힘들었노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뭐, 나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 있었지요. 이전에도 거의 집을 돌보지 않고 뛰어다녔으니까, 집에서는 아예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던 거예요.”

무려 징역 10년을 구형 받았던 사람 유남선이다. 올해 나이 66세, 작달막한 키에 세월의 풍파가 스치고 지나간 그의 얼굴엔 주름이 깊었다.

 

징역 2년 선고받아 복역 그랬다. 감옥에서 나오고 난 80년대 초반에도 그는 여전히 농민운동의 일선에서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르는 날들이 숱했다.

어느 날, 집에 들렀더니 두 아들이 기운이 쏙 빠진 채 앉아 있었다. 쌀이 떨어지고 집에는 달랑 라면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보통의 가장이라면 만사를 팽개치고 일당벌이라도 나가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대로 또 집을 나왔다. 아이들에게는 뭐, 사내자식들이 그 정도로 기운이 빠져있느냐며 한 마디를 해주었을 뿐이었다. 아픈 아이가 병원에 가자는 것을 뿌리치고 나온 적도 있었다. 어찌 보면 독한 것이고 어떤 이는 정상이 아닌 삶이라고 혀를 찰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엄중한 시대에 자신의 가정을 돌보며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유남선의 비정상적인 삶에 최소한의 빚을 졌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구속되고 난 이후에는 돈벌이를 위한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생계는 모두 아내가 맡아 꾸려갔지요. 아내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어요. 보험회사 수금원도 했고, 생선 배따는 일, 슈퍼마켓의 점원 등을 전전하며 애들을 키웠는데……, 뭐 그렇게 사는 거지요.”

그의 얼굴에 한 점 회한이 스치는 것도 같았다. 자신의 삶에 후회는 없을지언정 피붙이들이 겪은 고통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돌덩이로 가슴에 남았으리라.

정말 돈이 없었다. 80년대 초반이었던가. 짜장면이 60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아마 두어 끼를 놓쳤던 것 같다. 짜장면 한 그릇만 먹으면 정신이 나겠는데, 그 돈이면 춘천에서 홍천까지 갈 수 있는 차비였다. 잠시 고민하던 유남선은 버스에 올랐다. 사람을 만나고 조직을 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짜장면 한 그릇으로 한 사람의 동지를 만날 수 있다면 당연히 배를 곯더라도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다보니 어쩌다 하루 세 끼를 다 챙겨 먹으면 오히려 속이 불편할 지경이었다. “하루는 유병곤 회장님을 모시고 철원을 갔다 오는데, 밤새 회원들과 토론하고 아침에 버스를 타려는데 차비가 없는 거예요. 그 때는 직행버스에 안내양이 있었는데 하도 다니니까, 우리 얼굴을 알아요. 하는 수 없이 우리 청평까지만 태워달라고 했지. 꼭 차비를 주겠다고 하고는 나중에 잊어버렸어. 허허, 직행버스를 다 외상으로 타고 다녔다니까.”

그렇게 뛰어다니며 일구어낸 대표적인 투쟁들이 농협민주화운동, 농산물 가격안정운동, 외국농축산물 수입반대운동 등등이었고 그 외에도 각종 농민대회와 현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안에 대처하며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을 보냈다.

특히 1985년에 정부의 무차별적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소값이 폭락하자, 농가 부채는 급증하였고 전국의 농촌에서 자살이 속출하는 비극이 펼쳐지고 말았다. 이에 춘천에서는 남면 창촌리 농민회가 주동이 되어 소값 안정, 부채 상환 연기, 자가 도축 허용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키우던 소를 반납하겠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 유명한 소싸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86년에 정부에서 양담배를 수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농민들의 분노는 더욱 끓어올랐다. 양담배 시판 첫날인 9월 1일에 전국적으로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는데, 강원 지역에서는 휴전선에 인접한 김화 지역에까지 투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우리 춘천 교구 관할권이 굉장히 넓었어요. 평창 일부에 북부 12개 시군, 그리고 가평, 포천까지 관할했어요. 그러니 차도 없이 다니기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 중에도 김화군은 제일 북쪽인데 민통선 안에 마현리라는 마을이 있고 거기에 천주교 공소가 있어요. 군종신부가 동행을 해야 민간인이 들어갈 수 있지요. 그런데 그곳까지 농민들 교육해보겠다고 신부님 둘을 앞세우고 들어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대남방송이 바로 들려오는 철책선 아래에서 무슨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갔는지, 참. 그래도 86년 시위 때 김화군에서 꽤 큰 규모로 경운기 시위를 했어요. 성당 옆에 주욱 세워놓은 경운기를, 밤에 경찰들이 와서 송곳으로 죄 펑크를 내서 사흘이나 항의 농성하고, 대단했어요.”

6월항쟁의 강원도 구축

80년대를 회상하며 유남선은 그 시절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이 빨라지곤 했다. 동지를 찾아 밤길을 가다가 간첩으로 신고를 당하기도 하고, 늘 서너 명의 기관원이 따라 붙던 가장 힘든 시절이었지만, 어쩌면 가장 빛나는 시절이기도 했으리라.

농민운동의 와중에도 그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강원도 사무처장을 맡아 6월 항쟁을 이끌었다. 6.29선언 이후에는 단식농성을 하며 후보단일화를 위해 노력했고 대선에서는 공명선거 감시운동에 나서 강원도에서 3,000명의 감시단을 조직해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전민련 강원도의장, 춘천 민민련 의장과 더불어 가농의 지도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1992년에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된다. 물론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야망이 있어서 출마한 것은 아니었다. 농민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연장선에서 정계진출의 필요성을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권 후보가 한 차례도 당선된 적이 없는 보수적인 지역에서 시위나 하는 사람, 무서운 사람으로만 알려진 유남선이 당선되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낙선했다. 이후 보궐선거와 총선에 두 번 더 출마 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두 번째 선거에서는 근소한 표차이로 떨어졌는데, 어쨌든 출마를 통해 많은 시민들에게 믿음을 얻게 되고 지지에 대한 책임감이 무거워진 것도 사실이다.

그는 시민들과 농민들을 위해 좋은 지역사회를 위해 해야 할 역할을 모색하고 있으며 올해는 구체적인 사업이 시작될 거라는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그가 어떤 일을 하든 잘될 것이라는 예감을 한다. 그가 들려준 이런 이야기 때문이다.

“한창 운동을 할 때, 돈이 없잖아요? 그러면 무작정 가방에 유인물 넣고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때마다 꼭 누군가를 만나요. 만나면 돈을 또 주고. 아주 여러 번 그랬어요. 참 이상한 일이기도 한데 그렇지 않았으면 일을 못했을 거예요.”

그것은 사실 이상한 일도, 우연도 아니다. 유남선이 가진 인품과 광범위한 인간관계가 만들어낸 필연이었다. 그 필연이 언제까지나 유남선과 함께 하길, 그래서 그가 여전히 크나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농촌과 지역사회가 좀 더 살만한 세상이 되기를! 〈소설가 최용탁〉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