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이라는 베트남
농협이라는 베트남
  • 임채원 MBC(문화방송)PD
  • 승인 2011.12.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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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부자 농협 가난한 농민’ 취재 뒷얘기

취재 기간 내내 <PD수첩> 선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나는 농협이라는 베트남에 발을 담근

▲ 임채원(문화방송 프로듀서)
존슨, 농협이라는 이라크에 몸을 담근 오바마.”

농협은 총 자산 규모가 약 280조 원으로 삼성(약 230조 원)을 능가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면서도 횡령이나 수뢰와 관련하여 뉴스가 계속 터져 나오는 조직, 그 이면에는 비상근 명예직으로 자처하면서 진정한 실권을 쥐고 있는 중앙회장, 그리고 중앙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잡음들, 이 모든 것들은 제작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번 농협 취재는 가장 힘든 취재 중의 하나였다. 계속 새로운 문제들과 마주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확인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베트남의 존슨 행정부처럼 취재가 더 이상 진행되기 힘듦에도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는 수렁 같은 상황이었다.

농협의 문제점은 항상 취재상의 어려움과 결부되어 나타났다. 첫째, 농협과 관련하여 공개된 자료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농협법’에 따르면 농협과 관련한 정보는 조합원들에게 공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농협중앙회는 차치하더라도 지역 조합에서조차도 운영과 관련해서는 몇 몇 용기 있는 대의원들의 제보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얻기 어려웠다.

둘째, 한 취재원의 말처럼 “농협은 인적 결합체”라는 점이다. 제작진은 취재 과정에서 이 점을 처절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농촌 공동체는 규모가 작을수록 더욱 더 인적 관계망에 의존하며, 이는 농민과 농협 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즉 개별 농민이 농협 관계자의 비리를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속된 말로 농촌에서 “얼굴 맞대고 사는 처지”에서 그런 문제들을 세상에 꺼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PD수첩>에 제보할 열의는 있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설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제작진은 몇몇 중요한 제보자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농협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전문가를 섭외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공개된 정보가 제한적이다 보니 아무리 농협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하더라도 내부적인 원인을 진단할 때는 항상 유보적인 의견 밖에는 청취할 수 없었다. 전문가가 탁월한 식견이 있음에도 농협의 비밀주의적인 운영을 넘어설 수 없다는 데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농협을 취재하면서 지적하고픈 농협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권력을 감시하는 ‘감사 시스템의 부재’이다. 실질적으로 중앙회장이나 대의원 조합장 그리고 지역 조합장들을 제어할 수 있는 견제 장치는 거의 무력하거나 형식적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취재 중 만난 한 현직 조합장 또한 감사 시스템의 부재가 농협의 가장 큰 문제라고 밝혔다. 농협중앙회장은 비상근 명예직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인사권을 쥐고 있으며, 인사권 중에서도 중앙회와 지역 농협을 감사해야할 감사위원과 조합 감사위원장을 중앙회장이 선임하는 구조가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감사받는 사람이 자신을 감사해줄 사람을 뽑는 구조다. 또한 감사를 요청한 지역 조합 감사를 조합장이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폭행하고, 감사직에 출마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례들이 보고되기도 했다. 보통 이사나 감사와 같은 지역 농협의 대의원들은 조합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다 보니 실질적인 조합장의 권력은 비대한 데 반해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견제 장치는 상대적으로 미비해지는 것이다.

중앙회에서 내려오는 무이자 자금, 추곡 수매와 관련한 농협 RPC(종합미곡 처리장)문제, 조합장 비리 문제 등 농협과 관련한 모든 문제들의 접점이 바로 이 ‘감사 시스템의 부재’다.

또한 RPC의 문제와 농협을 관리 감독하기보다는 이용하려는 정부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다만 힘든 취재였지만 선뜻 꺼내기 어려웠던 주제를 과문함을 무릅쓰고 다뤘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싶고, 방송 후에도 좋은 말씀을 남겨주셨던 많은 분들도 그런 용기를 높이 사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방송이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모든 제작진을 대신해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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