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의 시간, 60년의 세월
18일의 시간, 60년의 세월
  • 강광석 강진군농민회 사무국장
  • 승인 2011.09.11 2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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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석(강진군농민회 사무국장)

10월 중순부터 나락을 수확하기 시작해 11월 말 보리를 심는 일까지 마치면 또 1년이 지나갑니다.

이런 시간들이 모여 세월이 되지요. 세월은 과거가 되고 잊혀지고, 잊혀진 자리엔 새로운 세월이 덧그림처럼 채워집니다. 참으로 허망하다 싶은 정도로 빨리, 부질없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지나갑니다.

2월 고추 모종을 파종하고 5월 두둑에 터널을 씌워 7월부터 수확한 고추를 지금까지 돌보고 있습니다. 고추나무 2,200개와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사랑하며 때로 싸우며 살았습니다. 몇몇은 열매를 맺기 전에 죽었고 지난 태풍에 자신의 가진 것 절반이상을 땅바닥에 쏟고도 버텼습니다.

장마철엔 물고랑을 더 깊게 내기위해 삽질을 멈추지 않았고 최근 10여일간 늦더위에는 호스로 물을 길러와 고랑을 적셔주었습니다. 어른들은 음력 8월 15일까지 머금은 고추 꽃은 서리 오기 전에 알이 차 수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잘 견디면 11월 초순까지 고추를 돌보게 됩니다.

홍장군, 747, 금수강산, 대들보, 1박2일은 고추 모종 이름입니다. 홍장군은 고추 중에 장군처럼 훌륭한 고추겠고 금수강산이나 대들보도 아름답고 당찬 이름인데 도무지 747과 1박2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을 실천하라는 의미에서 747인가 생각해볼 수 있고 1박2일은 고추가 하도 많이 달려 1박 2일로 수확해야 된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그들과 함께 근 1년을 견디는게 농부의 시간입니다. 어른들에게 그 세월은 ‘징그런 세상’이고 ‘갈라진 논에 물 스며들 듯’이 감쪽같은 세월입니다.

집에서 골논 다랑치까지 족히 2km를 넘는 길을 경운기와 자전거로 농사짓는 60년 농사꾼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제, 그 길을 다 합쳐 놓으면 서울은 몇 번 왔다 갔다 했을까요?”, “그 길에서 경운기사고로 죽을 뻔 했으니 저승길을 몇 번 갔다 왔네 그려” 하십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 년은 365일 이지만 60년은 눈 깜짝할 시간입니다. 몇 년 전 겨울, 빈 들판에 한동안 서서 하염없이 운 적이 있습니다. 농민대회를 준비하면서 마을방송을 다닐 때였습니다. 아이들 타고 다니는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걷는 백발의 어르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서러웠습니다. 평생을 이 땅에 의지해 오직 자식들을 위해 농사를 짓고 살았을 모든 부모들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것을 온전하게 단 한 가지도 챙기지 못하고 살아온 분들의 애닳고 고된 평생을 누가 보상해 줄까요? 저는 생각합니다. 농민운동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저 분들의 눈물과 애환을 풀어드리는 것이 농민운동이고 그것이 내 삶의 목표라고 말입니다.

이 땅에서 근대화, 산업화의 물결이 넘쳐나면서 농촌은 늘 한쪽 귀퉁이를 내주는 희생만 강요당했습니다. 60년을 농사지으신 분들은 60년 동안 그것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그 물꼬를 돌려야 합니다. 일방적 희생에서 적절한 보상으로, 천덕꾸러기 농민에서 자긍심과 명예가 넘치는 농민으로, 지가 알아서 버텨야 하는 농촌에서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농촌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5월 중순 모내기부터 10월 중순 수확까지 실제로 농민들이 일하는 시간이 18일밖에 안된다고 말입니다. 모심는 날 하루, 제초하는 날 하루, 약하는 날 하루, 수확하는 날 하루. 이런 식으로 18일을 일하고 900평에 100만원 넘게 벌고 거기다 직불제를 받으니황제의 직장 아니냐는 식입니다. 실제 우리가 일하는 날이 18일이라고 저명하신 경제학자들이 말해도 딱히 저항할 논리는 없습니다.

노동생산성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농업노동에 대하여, 정부의 보상이 지나치게 많다고 말하는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 일찍이 덴마크 농민이 되지 못한 후회를 뒤늦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이것만은 알아야 합니다. 나락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믿음으로 한 포기 한포기 눈도장을 찍는 농부의 마음이 숫자로 평가될 수 없음을 말입니다.

아직도 농수로 포장이 안 된 논을 돌보기 위해 몸으로 고랑을 치는 농부의 수고에 대해, 그들의 삽질과 정성이 절실함의 다른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2012년이 코앞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 아니고 시작의 계절입니다. 농민들과 함께 우리도 한번 삐까번쩍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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