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나들이

  • 입력 2011.05.30 13:39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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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울에 다녀왔다.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꼭 갈 일이 아니면 되도록 피하는 게 서울행이다. 천생 촌놈이라 서울 지리도 잘 모르거니와 빼곡히 선 건물과 수많은 인파에 곧 멀미가 나기 때문이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안국역에 내렸다. 사람들이 물고기 떼처럼 몰려다니는 인사동 거리에서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경인미술관이라는 곳. 도심 한 복판에 제법 운치가 있게 꾸며놓은 곳이었다.

여러 전시관 중에 내가 찾은 곳은 ‘田, 戰, 殿’이라는 이름의 제 6관이다. 입구에 서 있는 이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인사동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입성의 농투성이들이다. 전시회의 주체인 그들은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던 이들이다.

4대강 죽이기 사업으로 농토를 잃고 내쫓기게 된 이들이 실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은 투쟁을 해나가고 있다. 이들이 투쟁기금 마련 차원으로 각계 유명인사의 작품을 기증받아 전시회를 하는 것이었다.

전시실을 한 바퀴 둘러보니 쟁쟁한 명사들의 작품들이 꽤 많이 걸려있다. 신영복 선생의 글씨와 이철수의 판화, 임옥상, 유연복, 장일순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이들이 작품을 내주었다. 신경림, 정희성, 송경동 같은 시인들은 육필로 쓴 시를 보내왔다. 아마 값을 매기면 꽤 큰 금액이 될 터였다.

더 가슴 뭉클한 작품은 농민들의 것이었다. 초등학생이 쓴 편지와 어느 농민이 신던 신발, ‘우리 그냥 농사짓게 해주세요’라고 누더기 현수막 등이었다. 모쪼록 다 팔려나가길 바라며 가난한 내 주머니를 탓하고 있는데 전시실 가운데에 둥그렇게 의자가 놓인다. 서예 작품을 여러 편 내준 소설가 김성동이 참석해 청중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나도 끄트머리에 앉았다. 이십 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가를 아는 중년의 여성 팬이 십여 명, 전시회를 보러 온 수녀님 두 분, 그리고 유명한 소리꾼 임진택 선생도 계셨다. 김성동은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을 비롯한 여러 실정을 매섭게 비판하고 일제 강점기부터 흘러온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을 울분에 찬 목소리로 토로하였다. 여러 대목에서 숙연해졌지만 특히 그가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대목은 크게 귀담아 들을 만했다.

“내가 교수나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만나면 물어봅니다. FTA에 대해서 원고지 한 장, 그러니까 이백 자 내로 명쾌하게 설명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제대로 설명하는 자를 한 명도 보지 못했어요. 민중들에겐 명쾌하고 짧게 전달해야 해요. 그게 바로 노동하지 않고 농사짓지 않으며 먹고 사는 지식인들의 책무입니다. 4대강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이 시대의 지식인, 먹물들 전부 직무유기를 하고 있어요.”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대화 시간이 끝나고 근처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농민대표가 일어나 경과보고를 하고 술이 몇 순배 돌자, 임진택 선생이 일어나 노래를 한 곡 뽑겠다고 했다. 저 유명한 ‘똥바다’의 소리꾼은 처연한 목소리로 ‘부용산’을 불렀다. 현대사의 기막힌 아픔을 담은 노래가 좁은 식당 안을 가득 채우고 나는 연신 소주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갑오농민전쟁 때 고부군수를 지내며 악정을 일삼아 전봉준의 봉기를 불러온 조병갑이 얼마 후 판사가 되어 동학 교주인 해월 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건 역사의 아이러니도 아니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미 농민은 국민에서 제외시켰다는 씁쓸한 자조와 함께 술자리가 끝날 무렵 임 선생이 노래 하나를 더 뽑았다.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빈 산’이라는 노래였다. 마치 질식사를 목전에 둔 농민현실을 이야기 하듯, 죽음의 분위기가 처절한 노래였다. 노래를 마친 그가 말했다.

“바둑을 둘 때 사석이 있지요. 이미 죽은 돌이 나중에는 새로 집을 짓는 초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삽시다.”

이미 환갑을 넘긴, 전설과도 같은 숱한 이야기를 남긴 투사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밤늦은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어두운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자꾸만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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