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다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11

  • 입력 2007.11.10 14:08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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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을까. 며칠 전, 제사장을 보러 시내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장바닥에서 나는 한참이나 넋을 놓고 서 있어야 했다. 아찔했다. 닭 집 앞이었다. 중늙은가 털을 죄 뽑아버린 닭 한 마리를 도마 위에 올려놓더니 칼을 내리쳐 목 자르고 다리 자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게 끔찍했던 것이었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단칼이었다.

그런 풍경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웬일인지 자꾸만 시선이 끌려 지켜보고 있자니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어떤 생각 하나가 내 이마를 스치며 휙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오래 잊고 있었다는 듯이 다급하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내는 익숙한 솜씨로 닭의 배를 가르더니 내장을 꺼낸 뒤 몸통에서 분리된 것들을 왼편의 플라스틱 통 속으로 던져 넣어버린다. 목과 발과 똥집과 내장은 각기 분리된다. 철저한 분리수거라니. 그나마 효수되지 않았다는 것만이 다행이라면 천만다행이었다. 사내의 등 뒤에는 쓸데없는 부분을 모조리 삭제해 사리처럼 빛나는 닭들이 진열대 위에서 가지런했다. 그것을 바라보자니 마치 내가 통닭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잠깐 휘청했다.

나는 꽁초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버리고 새 것으로 갈아 물며 표정을 더욱 구긴다. 아까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 이번에는 세차게 뒤통수를 때린다. 나는 사내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처참한 도륙의 현장을 누구 하나 시비하여 말리는 사람도 없이 세상은 너무도 평온했다.

당신들은 나의 이 어처구니없는 표현을 꼴같잖다고 혀를 차며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바란다. 닭 잡는 일이라면 나도 이미 스물 근처에서 그 요령을 다 터득한 터에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그때, 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 그 무엇 때문이다. 그것이 다소 과장되었다거나 너무 감상적이었다고 나무란다면 나로선 달리 할 말이 없겠지만.

그때, 나는 닭 잡는 사내의 얼굴에 겹쳐지는 한 여자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여자. 웬디 커틀러. 한미 자유무역협정 미국 측 수석대표. 어떤 사람은 그녀를 일러 약소국가를 일방적으로 침탈하는 더러운 제국의 협상단 수장답지 않게 수더분한 외모(그녀는 눈알이 굵어 익살스럽다)를 가졌다는 말들을 했지만 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흠칫 몸을 떨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웬디 커틀러의 얼굴에 겹쳐지는 또 하나의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칼라 힐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당시 미합중국의 대표였던 여자. 기억은 많이 흐릿하지만 내 뇌리에 돋을새김으로 박혀있는 그녀는 거침없이 지껄이며 협박하고 안하무인의 행동을 잘 하기로 유명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있고 그 시는 내 첫 시집에 실렸다. 나는 시집을 꺼내어 “엽색 행각” 전문을 읽어본다.

〈칼라 힐스는 정부더러 발가벗고 달라하고/정부는 주기는 주되 천천히/천천히 무드 잡으며 벗으려 하는/사랑도 강간도 아닌 이따위 토색질이란〉

그 당시 칼라 힐스와 내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던 정부는 그래도 정조 개념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나 이번에는 상대를 바꾼 웬디 커틀러와의 애정행각에서는 노련한 바람둥이가 되어 어서 빨리 발가벗겨 이불 속으로 데려가 달라고 생으로 억지를 쓴다.

닭 잡는 사내가 제 마음대로 목 자르고 다리 자르고 배를 갈라 똥집까지 다 챙겼듯이 웬디 커틀러가 한국농업을 칼질하는 환상에 나는 그렇게 진저리를 쳤던 것이었다. 충직한 종이 되겠다고 웬디 커트러의 치마 아래로 무릎 꿇고 애걸하는 ‘조선 장닭’들의 어이없는 똥고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 것일까. 자존심의 최후의 보루인 ‘똥집’까지 그들의 만찬장 석쇠 위에 던져준 짓거리는 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그날 밤. 나는 제사지낼 새벽 한 시를 기다리며 “어이가 없다” 라는 시 한 편을 썼다.

〈관 벗어/걸/자리 없다//차라리 목을 쳐라/발버둥치지 않겠다/발목도 잘라라//핏발 선 칼잡이 추궁 앞에서//뱃속 확 열어 보이는/똥고집/조선 장닭 한 마리//봉인된 소금창고/똥집까지/석쇠 위에 던져준다//그것 참/허허 그것 참//욕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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