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이 제일 위대한 사람”

인터뷰 임봉재 가톨릭농민회 회장

  • 입력 2011.03.28 13:50
  • 기자명 최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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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생, 올해 일흔이라고 보이지 않는 임봉재 가톨릭농민회 회장. 가난한 농민의 맏딸로 태어난 임 회장은 먹을 것이 없어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러 다녔던 기억을 회상하며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마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나물을 먹고 살았고, 겨울에는 그마저도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기도 했다. 요즘에는 나물이 흔하지만, 예전에는 누구나 다 그렇게 해서 먹을 것이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20대 초반,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고향인 거제도를 등졌다. 그가 수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그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왜 같은 사람인데 우리 엄마는 큰소리도 치지 못하고 구박을 받아야 하는 걸까. 딸 낳으시고 어머니는 미역국도 못 드셨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충격이었다”라며 “뭔가 모르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해서 수녀의 길을 택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녀의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수녀원도 하나의 조직사회여서 권위주의가 지배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수녀원에서 검정고시 공부를 통해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을 겨우 가졌고 수녀원을 나오게 됐다.
그는 “60년대 말 시골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재건운동을 할 때다.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가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거제도에 있는 재건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며 “그 친구들이 지금은 50이 되어 동창회도 한다”고 웃음 지었다.

▲ 임봉재 카톨릭농민회 회장

그는 현재 경남 산청군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가 농촌으로 들어갈 때 세운 원칙이다. 돈들이지 않는 농사를 위해 종자도 직접 얻어다가 뿌리고, 농약·비료를 치지 않기 때문에 돈 드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그가 이런 원칙을 세운 것은 ‘돈’문제도 걸려있었지만, 그만큼의 돈을 벌려면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되도록 이면 환경 친화적으로 살자고 다짐한다”며 “가톨릭농민회에서는 ‘일과 놀이는 하나다’라는 마음과 다짐으로 산다. 즐기면서 살기 때문에 시골에 가면 재밌다”라고 말했다.

“일·놀이는 하나”

그가 농민운동을 접한 계기도 남달랐다. 지인의 추천을 받아 필리핀에서 공부한 신협운동을 거제도에서 해봐야겠다고 결정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임 회장은 “그 당시 마을을 다니면서 신협교육을 다니기 시작했다. 조직 하고, 가르치고, 한 달에 한번 씩 거제도를 돌아다니면서 교육을 했다”며 “이후 거제도에서 유류비축기지 반대 운동을 시작하면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라고 회상했다.

카톨릭신자인 그는 “난 항상 농촌의 엄마들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농촌엄마들을 위해 소식지를 만들자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농촌부녀’라는 4쪽짜리 소식지를 만들게 됐다”며 “이게 천주교 공소에서 반응이 너무 좋았다”고 미소 지었다.

임 회장은 1976년 1월 농촌부녀를 통해 교육이 있음을 공지하고 경기도 발안에서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2박3일의 교육기간에 30여명의 여성농민들이 모였으며, 교육과정에서 ‘가톨릭농촌여성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는 “현재 한국 4-H본부 김준기 회장님의 부인도 이 활동을 같이했다”며 “초대회장을 그분이 하고, 내가 2대회장을 하게 됐다. 이게 30대중반이었다. 이를 계기로 농민운동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회장 박점옥)의 대의원총회에서 자랑스런 여성농민상을 받았을 때 아주 민망했다는 그는 “농촌에서 땅을 지키며 농사를 지어온 엄마들이 받아야 할 상”이라고 강조했다.

남자·여자가 서로 존중할 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운동원칙을 가진 그는 “모든 운동이 사람답게 살고자하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대접할 때 자기(남성)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조화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화운동가로 소개되길

자신이 여성농민운동가로 소개되기 보다는 인간화 운동가로 소개되길 바란다는 그는 또 생명운동가 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며 너무 많은 것을 본다. 집에서 일을 하며 방에 뱀과 구렁이를 맞이 해본 적도 있다. 잡지 않고 달래서 내보낸 경험이 많다”라며 “그래서 이웃들이 약을 치라고 하지만, 이들이 살 수 있는 환경에서 내가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산도 가고 싶고, 통일이 되면 38선을 넘어서 몽골까지 무전여행도 하고 싶었다”는 그는 “마음으로 빚진 사람이 많은데 여력이 된다면 여기저기 옛날 회원들 찾아가서 얼굴도 보고 싶다”고 소박한 꿈을 전했다. 
  〈최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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