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판에서…

  • 입력 2007.10.29 10:03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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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들판을 채우던 속도보다 빠르게 가을들판이 비어 갑니다. 삼년 가뭄엔 먹을 것이 있어도 석 달 장마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다지만, 지리한 장맛비에도 살아남은 나락들은 악착같이 여물이 들었습니다.

콤바인으로 남의 가을일을 다니다보면 내 논도 아니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합니다.
‘비료를 좀 더 주지.’
‘논 좀 잘 말리지’
‘나도 이 정도는 농사를 질줄 알아야 하는데...’
하지만 어느 집에서나 비슷하게 드는 생각은 일종의 서러움입니다.

콤바인 가지고 온 우리 두 명과 칠십이 넘은 어르신, 새참도 들고 오지 못하는 허리 굽은 할머니.
사람 소리 사그라진 가을 들판에 기계소리만 처량합니다.

중국집에서 새참이 오고 지나가던 이웃 어르신 몇이 둘러앉습니다. 기계가 좋아 농사는 일도 아니라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볏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농협이 나오고, 그러다가 ‘니끼미’ 몇 번 섞어 들어가면 금방 파장입니다.

어떤 마을 이장님이 그럽니다.
“쌀개방 하면 망하고, 한칠레 FTA하면 망한다더니, 망하기는 뭘 망하냐? 배추값도 오르고, 가지값도 오르고, 다 올라가는데.”
그래서 그랬지요.
“그건 그렇다 치고, 칠십 넘은 염감님이 트랙터 몰고, 팔십 넘은 할머니가 품 파는 세상이 망한 것이 아니고 제정신입니까?”

가을 논둑에 서서 부질없는 상상만 합니다.
10년 후에 이 논둑에 서 있을 사람은 누구인가?
저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이 논다랑치들을 채우고, 비울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농업을 권할 수 있을까?
교사, 공무원이 되라고 이야기 하듯이.

촌놈이 읍으로 가고, 읍의 아이가 서울로 가고, 서울의 아이들은 강남으로 가고, 강남의 아이들은 미국으로 몰려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의 몰입에서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인간의 가슴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일찍 베어버린 조생종 논의 그루터기에서 맺지도 못할 녹색 잎사귀들이 논바닥을 채우고는 바람에 살랑이면서 늦가을을 조롱합니다. 된서리 한 번 이면 자취도 없을 것들이….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서러운 가을 들판에 서서 깊은 숨 한 번 쉬고, 침 한 번 꿀꺽 삼킴니다.

‘농민이 누구냐?
포탄이 날아드는 전쟁의 시기에도 씨앗을 뿌리던 사람이 아니더냐?
굶어 죽을 지언정 씨나락을 베고 죽던 사람들이 아니더냐?’
네 포기씩 베어 넘기던 상쾌한 낫질소리 보다는 못한, 콤바인 소리만 가득한 들판에 서서 다리에 힘 한번 잡아 봅니다.

손바닥에 침 한번 제대로 뱉고 낫자루 고쳐 잡던 심정으로 말입니다.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전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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