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 되

  • 입력 2010.06.14 16:14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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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열매솎기를 하다가 잠시 땀을 들이려고 담배 한 대를 피는데 산자락 끝 그늘 속에 눈에 익은 나물이 소복하다. 이미 동이 서고 꽃이 필 때가 된 취나물이다. 키는 한 자도 넘게 자랐지만 그늘 속이라 아직 연한 잎이 먹을 만했다. 새참 때라 출출한데다 뜻하잖게 취를 두어 움큼 뜯자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주로 소주를 즐기지만 봄나물이 나올 때면 막걸리가 입에 당겼다. 해서 봄이면 제일 먼저 나오는 홑잎이며 원추리, 잔대 싹, 다래순 따위를 때를 놓치지 않고 뜯어와 막걸리 잔께나 비우곤 한다. 들기름에 소금과 깨소금만으로 무친 산나물 한 보시기를 놓고 한 되쯤 비우는 막걸리야말로 봄철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아내에게 취를 꽃다발처럼 흔들며 빨리 삶아 무치라고 닦달을 하고 병에 든 막걸리는 주전자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둔다. 아직 해는 댓 발이나 남았지만 오늘은 혼자 술타령이나 하기로 하고 남은 일을 작파한다. 사실 별로 급한 일도 없었다. 복숭아 적과는 진즉에 끝났고 사과나무는 올해 첫 수확이라 별반 달린 것도 없다.

원두막에 앉아있자니 아내가 쟁반을 받쳐 들고 올라온다. 낮부터 술이냐고 지청구 한 마디를 할 만한데 저나내나 요즘 속이 제 속이 아닌 것을 알다보니 별말 없이 내려놓고 간다. 첫 잔을 그득 따라 단숨에 비우자 막혔던 것이 내려가기라도 하는 듯 온몸이 다 시원하다. 쌉싸래한 취나물 향기를 음미하며 다시 한 잔을 따르니 취기는 기분 좋게 퍼져나가는데 마음은 무거워진다.

부지깽이도 들썩인다는 요즘 철에 하루에도 몇 번씩 과수원을 일없이 어슬렁거리게 된다. 산보삼아 돌아다니는 거면 오죽 좋으련만 간밤에 또 주저앉은 나무가 없나 살피는 것이니 속이 편할 리 없다.

용케 동해를 이겨내고 살아났구나 싶었던 나무들이 다 늦게 죽어가고 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열매가 맺혔던 복숭아나무도 시들시들 마르다가 죽어간다.

절반이 넘는 나무들이 죽거나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올해 살아갈 걱정이 태산이다. 본래 실한 농사꾼이 못 되어 남들 소출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한 해 농사 시작도 하기 전에 이 지경을 당했으니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담배 한두 대를 끄기가 일쑤다.

전국적인 사태에 신이 난 것은 수입업자들이란다. 수입하겠다는 과일 물량이 작년의 몇 배가 넘고 소비자들 역시 수입과일에 혀를 길들이고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 동해 피해를 보상한다며 조사를 해가긴 했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보조금이라고 몇 푼 생색내고 대부분 융자로 해줄 모양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이야 저금리로 돈을 빌리면 이리저리 굴리는 재주가 있겠지만 농사꾼이야 다시 돈 안 되는 땅에 넣어야 되니 그저 빚을 늘리게 될 뿐이다.

처음 농사를 지으러 내려올 때만 해도 빚을 지며 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돈을 벌어보겠다고 선택한 귀농은 아니었다. 도시의 무한경쟁과 아귀다툼에서 벗어나 내 아이들에게 흙을 가까이 하는 삶을 선사하고 싶었다.

사천 평이 넘는 과수원을 열심히 가꾸면 그런 낭만적인 농촌생활이 가능할 거라는 머릿속 계산도 있었다. 그런데 계산대로 되지 않는 게 농사였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이제야 조금씩 초보농사꾼을 벗어나는 느낌이다.

막걸리 한 주전자가 비고 해는 서산에 걸렸다. 어질어질 취기가 오르니 농사 걱정도 만만해진다. 사람은 우환에 살고 죽는다고 한 사람은 요절한 시인 김관식이었다. 생각하면 근심도 걱정도 없이 사는 일은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없는 인생인가.

언제는 정부에서 농민들 살림살이에 관심이나 있었던가. 반쯤은 분노로, 반쯤은 절망으로 살아가는 게 농민의 삶이란 걸 깨닫는데 십오 년 세월이 흘렀다. 주위의 많은 농민들이 거의 알코올중독자 수준으로 술을 달고 사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게다. 나 역시 술이 주는 잠시의 위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제야 진짜 농사꾼이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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