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쉬고 싶다

전농 광주전남도연맹 기 원 주 의장

  • 입력 2010.05.31 08:45
  • 기자명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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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어머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다는 기원주 의장. 매일 아침 어머니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집을 비우는 날이 많은데도 시간이 날 때마다 전화로 문안인사를 빼먹지 않는 투사 기원주의 또 다른 내면이다. 그는 2월 23일 파행으로 끝난 광주전남도연맹 대의원대회 이후 적극적인 공식 활동을 자제 하고 있다.
지난 25일 전남 나주시에서 기원주 전농 광주전남도연맹 의장을 만났다.

- 극진한 효자라고 들었다

92년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그리고 농민운동 한다고 돈을 벌지 못하다보니 집사람이 살림을 꾸려 가느라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와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한다. 어머니는 나보다도 집사람을 더 아끼신다. 그래서 혹여 내가 집사람을 서운하게 하기라도 하면 어머니한테 혼이 난다. 어머니는 아주 대가 세신 분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어떻게 잘 못할 수가 있나. 서울 회의에 가서도 잠깐씩 짬을 내어 안부 인사를 드린다.

- 초등학생 때부터 농사를?

▲ 기원주 의장

아버님이 몸이 약하셔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형과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고지모를 심으러 다녔다. 미리 돈을 받고 나서 모내기철에 모를 심어 주는 것을 고지모라고 한다. 4학년 쯤 됐을 때는 나 혼자서 한 마지기를 심게 됐다.

중학교 2학년 때 대학교를 보내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학교를 그만뒀다. 당시 하고 싶었던 일이 두 가지였다. 억울한 사람들을 구해 주는 판사가 되거나 커다란 농장을 갖고 싶었다. 당시 중학교의 납부금이 1천300원이었는데, 나락 몇 섬값이었다.

그 후 농사를 하면서 소 14마리를 키웠다. 막내숙부의 도움으로 블록을 찍는 기계를 사서 1년 동안 블록을 찍어 직접 소막사를 지었다. 몇 년 지난 후 사료가 나오기 시작 했지만 풀을 베어 소죽을 쒔다.

- 어떻게 해서 농민운동을 하게 됐나?

1980년 5·18을 겪은 후 수세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황색바람이 불었다. 87년부터 광산농민회를 창립 하는 일에 직접 관여 하게 됐다. 그러나 조직만 해 놓고 간부 활동은 하지 않았는데, 97년부터 1년만 해달라는 걸 지금까지 오고 있다.

당시 부회장을 맡아 달라고 해서 수락 했는데 나중에 보니 회장역할을 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회장이 몸이 안 좋았던 것이다. 

그 후 2000년 부채싸움을 하다 수배를 당한 후 집행유예를 받고 집에서 쉬는데, 2001년 하반기에 도연맹 부의장으로 불려갔다가 1년 뒤에 시농민회 회장으로 다시 소환됐다. 그리고 2004년 이경해 칸쿤투쟁 때 구속 됐다가 나와서 쉬는데 또다시 도연맹 부의장에 불려가고..그러다가 이렇게까지 왔다.

- 이후 활동 계획은?

농민운동이 예전 같지 않다. 김영삼 대통령 때 보조사업이 시작 되면서 많은 활동가들을 빚쟁이로 만들어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농민운동이 많은 타격을 받았다. 10년전 그때 그 상황이라도 유지되면 좋겠다. 그렇지만 이제는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쉬고 싶다.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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