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름, 상하

  • 입력 2010.04.12 15:33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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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 뒤늦게 그날에야 불쑥 그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문득 떠오른 그 이름 끝에 ‘아하!’가 아닌 ‘아이고!’란 비명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손바닥이 무릎을 몇 차례 세차게 때렸고 마지막에는 머리통까지 쥐어박았다. 그래, 맞아도 싸다. 나란 인간은 더 맞아야 했다.

피만큼이나 끈끈해서, 그래서 동지라고 불렀던 그 이름. 농민이라는 명분을 깃발처럼 내걸고 면지회를 조직하면서, 농민회라는 끈끈함으로 수없이 많은 집회에 몰려다녔으며 수없이 많은 밤낮을 슬픔으로, 분노로, 때로는 반가움으로 소주잔을 비워냈던 날들이 이마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때 우리가 비워냈던 한과 분노의 소주가, 그 이슬처럼 맑았던 소주가 그의 간을 녹슬게 한 독이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또 많은 술잔을 비우게 했던 기억이 눈 속으로 파고들어와 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술 잘 마시고 노래 잘하고 ‘관광버스춤’ 잘 추고 그러나 화 낼 줄을 몰라 얼굴에 늘 싱그러운 웃음을 매달고 살면서 농민회나 동네일이라면 하던 농사일도 내던져버리고 달려가던 약간 대머리의 타고난 팔자 이상하. 회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에 먼저 면지회장을 먼저 해보고 난 뒤에 맡겠다더니 면지회장도 못 해보고 덜컥 드러누워 버렸던 그이. 안 그래도 장작처럼 마른 몸피는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모습은 끝내 꽃샘추위가 몰아치던 날 훨훨 떠나버린 나와 동갑의 사람. 아직은 친구의 죽음이 너무 낯설었던 시절이라 그 죽음에 대한 예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때늦은 자책이 이제는 죽음에 익숙해진 나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를 농민회로 불러들인 장본인은 창주와 나, 주활이를 비롯한 몇몇이었다. 처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우리이겠는가. 우리는 집요했다. 그는 농민회 가입은 거부했어도 소주는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주 그를 찾아가고 불러내어 악착같이 소주만 마셨다. 농민회 가입 권유는 더 이상 하지 않고 주구장창 소주만 마셨다. 그게 얼마나 훌륭한 덫인지를 아는 사람은 다 아시리라. 그렇게 그는 우리가 놓은 올가미로 들어왔다.

상하. 그의 기일이 3월 24일이었던가? 정말이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유라면 수십 년 만이라는 강추위와 잦은 비로 일이 너무 늦어 며칠 전에야 겨우 전정을 마친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겁한 핑계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는 그 명확한 증거 앞에 나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창주와 영수에게 전화를 했지만 두 사람도 내 말끝에는 망연해지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자책이었을 것이다. 전화 말미에 농민회 집행부를 욕하면서 가을, 누구의 기일에 산소를 찾아간다는 문자가 날아오면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체신머리 없는 생트집의 강짜를 부렸다.

이상하 1주기에 산소 앞에 작은 돌 하나를 세우고 우리는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친구라고 하는 인간들도 그의 선후배들도 제삿날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 지난 해, 창주와 나는 우리들의 못된 짓거리에 침을 뱉으며 앞으로는 이상하 기일을 연례행사로 치르기로 의논을 모았다. 그래서 농민회 행사로 꽤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가서 엎드려 사죄했지만 우리는 올해 또 못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어제 서울에서 마신 술 탓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늦은 아침에 복숭아밭으로 들어가 아직 다 치우지 못한 전지목을 묶다말고 전화를 꺼내들었다. 늦었지만 그의 산소에라도 갔다 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먼저 창주와 영수에게 제안을 해서 합류하기로 한 뒤에는 마땅히 알려야 할 이름이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느닷없는 제안이 괜히 부담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말았다.

나뭇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생각하니 내가 너무 티를 내어 방정을 떤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삶과 죽음에는 뚜렷한 경계가 있어 산 자가 죽은 자를 망각하는 일이야 당연한 것이거늘, 어쩌면 잊어버린다는 것이 오히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거늘. 그렇게 되면 삶과 죽음은 얼마나 유기적이면서 또 친화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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