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매뉴얼대로만 하면 괜찮은가

2025-11-23     이종혁(경남 산청)
이종혁(경남 산청)

지난 3일 한국수자원공사 남강댐지사 앞에서 ‘남강댐 상류 지역 주민 총궐기대회’를 치렀다. 수해가 난 뒤 만나는 주민마다 “남강댐에서 수문을 조금만 일찍 열었더라면”, “댐 수위를 미리 낮춰놨더라면 피해가 훨씬 적었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수해 이후 100일이 지나도록 남강댐지사는 어떤 설명도,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우리가 집회 신고를 하자 그제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피해 주민들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현실이 착잡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지만 진심으로 준비하는 주민들의 마음이었다. 농민회는 집회 절차나 진행 방식에 익숙했지만, 대부분의 마을 주민에겐 이 모든 과정이 낯설었다. 집회 신고부터 인원 조직, 차량 배치, 역할 분담, 각종 홍보물을 만드는 일까지. 현수막, 머리띠, 피켓 문구 한 줄을 두고도 여러 사람이 의견을 모으며 밤이 늦도록 토론했다. 한 글자라도 우리의 억울함과 절박함을 더 정확하게 담고 싶어서였다. 또 “참석한 주민들에게 밥이라도 대접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여러 방법을 고민했다. 결국엔 떡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서로 알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회가 끝난 뒤 누구보다 먼저 쓰레기를 정리하고, 머리띠와 종이피켓을 살뜰히 챙기며 “이거 한 번만 쓸건 아니제?” 하는 마음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우리가 집회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안전사고 나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이 입버릇처럼 나왔다. 자신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외치러 나온 자리였지만,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이 진짜 농민들의 모습 아닌가 싶었다.

대회가 끝난 후 대책위 사람들은 농민회에 여러 차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농민수당 이후 산청군농민회가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시간들이었다. “농사일로 바쁠 텐데 다음엔 저녁에 보자”, “따뜻한 밥 한 그릇 못 줘서 미안하다”는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절망적인 순간임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대책을 마련하고 자신의 삶터를 지키려는 마음이 눈에 훤히 보였다.

전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댐 관리 실패로 댐 하류 지역이 피해를 본 경우는 있었지만 댐 상류 지역의 피해 사례는 없었다. 남강댐지사 측에서 수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민들에 대한 공감은 찾아볼 수 없다. 매뉴얼대로 댐 관리를 했고, 상류 지역의 하천이 좁고 제방이 낮아서 일어난 피해라 남강댐지사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대회 당일에도 지사 정문을 굳게 잠그고, 마지못해 지사장만 잠시 나와 형식적 사과를 했다.

매뉴얼대로만 일하면 정상적인 운영인가? 그 결과가 상류 지역 침수로 이어진다면 매뉴얼을 수정하거나 만수위를 유지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함께 고생한 부자(父子) 농민이 있다. 두 농민 모두 딸기 하우스 전체를 잃었지만 내년 농사를 위해 딸기 어미 묘를 키우고, 모종을 넉넉히 해놨으니 나에게 필요한 만큼 나눠주겠다고 한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누가 누구를 챙기는 걸까?

이제 딸기가 조금씩 나온다. 딸기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 농민이 농사를 짓지 못하는 시간은 어떨지 상상이 안 된다.

끝으로 이번 대회는 주민들의 진심어린 연대와 절박함이 만들어낸 자리이다. 이제는 종이 위의 매뉴얼에만 머물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들려오는 요구와 경험을 제도화하는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