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상식한 데다 비겁하기까지” 한 송전선로 건설사업
여전히 ‘깜깜이’ 그 자체인 ‘입지선정위원회’ 무능·불통 행정, 적기 대응 기회마저 빼앗아 농민·주민들 “농촌에도 사람이 산다” 토로
[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
국가기간 전력망 건설 추진계획이 확정되고 34만5000V(345kV) 초고압송전선로 입지가 가시화되며 경과대역 농민들과 주민들의 투쟁 또한 거세지고 있다.
특히 지난 9월 8일, 출범 직후부터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는 고압 송전선로·철탑 건설 반대 영암군 대책위원회(위원장 정철, 영암대책위)는 9월 10일경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8시 한국전력공사 나주 본사 앞에서 피켓시위를 진행 중이다. 정철 위원장은 강추위가 엄습한 지난 18일에도 상복을 입고 한 시간가량 상여소리와 함께 투쟁을 벌였다.
영암군대책위에 따르면 농민들이 한전의 345kV 초고압송전선로 건설계획을 알게 된 건 지난 9월 초쯤이다. 정철 위원장은 “이미 지난해 12월 5일 입지선정위원회 1차 회의에 이어 8월까지 4차 회의가 진행됐지만, 주민들은 해당 사안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동네 카페에서 한전 직원이 이장 몇 명 불러다 주민설명회를 계획하다가 주민 몇몇이 송전선로가 영암군을 경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최적경과대역이 주민들 모르게 장기간 논의됐고, 모른 채 결정됐다. 행정에서는 이 사안을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하며 숨겨 사실상 농민과 주민들이 적기에 대응할 기회마저 빼앗고 말았다”고 분개했다.
현재 결정된 345kV 신해남-신장성 송전선로 최적경과대역은 영암군 영암읍·금정면·덕진면·신북면을 관통·연접하게 된다. 10년 전 귀농해 금정면 연보리 다보마을에 거주 중인 김노연씨는 본인이 운영 중인 카페에서 거주 중인 삶터와 10년간 일군 농지 위에 거대한 송전선로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한전 직원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따져 물었지만, 돌아온 건 “집 사줄테니 이사 가면 되지 않느냐”는 말과 황급히 덧붙인 “농담이다”라는 대답뿐이었다.
이후 김씨는 충격과 분노, 불안감에 매일 잠을 이루지 못할뿐 아니라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라 토로했다. 김씨는 “당시 상황이 잊히질 않는다. 송전선로가 지나가는 쪽에 집을 지어 살고 있다고 하니 한전 직원이 산 능선 반대편으로 선을 그으며 이렇게 하면 어떻냐고 되물었다”라며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기업 전력수요를 위해 국가기간산업이란 명분 아래 이렇게 농촌을 짓밟을 수 있나’, ‘국가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농민과 농촌 주민들은 국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지금도 끊이질 않는다”고 밝혔다.
면사무소 앞에 천막농성장을 차린 신북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송전선로가 정확히 어디를 관통할지 모르는 실정으로, 우연히 입수한 한전 사업설명회 자료 내 지도로 경과지가 어디쯤이겠거니 추측할 뿐이다.
강신근 신북면 박망동마을 이장은 “송전선로 사업에 대해 전혀 모를 때 한전이 마을잔치를 후원한다는 얘길 들었다. 무슨 일로 한전이 좋은 일을 하나 싶었는데, 송전선로 얘기가 슬그머니 나와 마을잔치를 취소해버렸다”라며 “유야무야된 줄 알았는데 입지선정위원회 3차 회의까지 진행하고 8월쯤 한전에서 이장들 불러다 설명회를 했다. 그제야 신북면이 345kV 최적경과대역에 포함된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강 이장은 이장조차 몰랐을 만큼 철저히 자기들끼리 사업을 진행했다며 지금도 이 사업에 대해 잘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전했다. 또 알려고 나서지 않으면 절대 한전에서 사업에 대해 먼저 알려주지 않아 지금도 송전선로와 철탑이 생기면 어떤 피해가 있는지 직접 하나하나 찾아보며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북면 학동리 신월마을에서 거주 중인 농민 양기승씨는 “깜깜이 입지선정위원회에서 정할 거 다 정해놓고 너희들 얼마 보상해줄 테니 아무 소리 하지 말라는 한전과 정부의 행태가 공산주의와 다른 바 없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정부라고 하는데, 주민들이 반대하는 이 사업을 왜 이렇게 밀어붙이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라면서 “국가사업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사업을 일단 중단시킨 뒤 주민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게 이해를 구해야 한다. 농촌에도 사람이 산다. 농민과 주민 의사를 깔아뭉개며 전국을 관통해 송전선로를 만드는 게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를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권혁주 영암대책위 집행위원장은 “설명회를 몇 번 무산시키자 한전에선 입지선정위원회 회의 일정도 제대로 알려주질 않는다. 겨우겨우 하루 전날에야 어디서 몇 시에 한다고 언질을 주는데, 집회 신고를 48시간 전에 해야 한다는 걸 아무래도 인식하는 것 같다”며 한전의 비겁한 태도를 꼬집었다. 아울러 권 집행위원장은 93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345kV 신해남-신장성 송전선로 건설사업 입지선정위원회의 운영 방식도 지적했다. 권 집행위원장은 93명의 위원이 본인 지역과 상관없는 경과대역 지정에도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다 사업시행자를 대표해 한전 직원이 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해 사실상 위원회를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짚었다. 뿐만 아니라 「전원개발촉진법」 시행령이 입지선정위원회 위원 자격 또한 정확히 명시하지 않아 위원들이 그저 거수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며 제도 강화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