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가을비와 포전거래

2025-11-09     최보란(강원 정선)

 

최보란(강원 정선)

겨울 사과 수확을 위해 다시 정선을 찾았지만, 그 일주일 내내 비가 쏟아졌다. 문전옥답, 창문 너머 밭만 보다 돌아왔고, 오래간만에 짝꿍과 아이 셋이서 오롯이 시간을 보내 행복했지만, 마음 한켠은 불안에 잠식되어 있었다. 예기치 못한 비라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이번 가을비. 마치 여름 장마처럼 쏟아지더니, 수확을 앞둔 사과들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다. 껍질이 갈라진 붉은 사과를 따내는 짝꿍이 한 번씩 고르는 숨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올해 겨울 사과는 유난히 예쁘고, 맛이 좋은 만큼 기대도 컸다. 그러나 늘 계산대로 흘러주지 않는 자연. 익숙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매번 새삼스럽게 배운다. ‘이게 농사구나’ 하고.

올해는 서로의 자리에서 버티는 해다. 아이 어린이집이 폐원하면서 서로의 역할을 나누었다. 짝꿍은 정선에서 농사를 전담하고, 나는 구례에서 아이를 돌보는. 통화로 밭 상황을 듣고, 사진으로 사과의 빛깔을 확인했다. 늘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며 농장 상황을 나눴었는데, 떨어져 있는 게 여간 쉽지 않다.

사과는 수확의 80%를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처음엔 오르내리는 시장 가격에 휘둘리지 않고, 일군 농민이 스스로 값을 매기는 것, 농장 운영비와 나와 짝꿍 인건비에 대한 당연한 값을 보장하고 싶었다. 물가 상승에 따라 값을 올리기도 했지만, 농사짓는 9년간 시장 값이 좋든 안 좋든 우리의 사과는 가격 동결이었다. 이 가격은 선택권이 많은 사과 시장에서 우리 사과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경쟁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간 사과값이 금값이니 우리를 잘 모르는 누군가는 우리를 ‘바보 같다’고 했다. 값 좀 올리라며, 공판장에 넘기면 편한데, 돈도 못 벌고 고생을 사서 한다나. 그놈의 돈돈돈. 사과를 따서, 선별하고, 포장하고, 고객들에게 문자 보내고, 박스에 주소를 붙이는 일까지. 모든 과정을 때로는 둘이서, 때로는 온 가족들이 힘을 합쳐 해왔다. 물론 택배를 보내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누가 먹을지 아는 사과를 보내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박스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떠올리며 보내는 즐거움이 있다. 몇 해째 꾸준히 주문해주는 단골 소비자들은 햇병아리 시절 우리의 어리숙함도 함께 해주었고, 이제는 종종 서로의 안부를 묻는 감사한 분들은 우리와 마음을 나누고, 함께 농사짓는 이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떨어져 지내는 현실, 택배를 도맡던 나의 부재, 짝꿍의 겨울 전정 일정…. 결국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긴 고민 끝에, 올해 수확 전량은 지역농협과 포전거래(밭뙈기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짝꿍은 겨울이 되면 꾸려진 전정팀과 일하러 다니는 일정이 추가된다. 가을 사과와 달리 겨울 사과는 저장 사과라 매일 포장과 발송을 하는데, 새벽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짝꿍이 맡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꿋꿋이 할 수 있다는 짝꿍의 말에, 정선으로 돌아갈 짐을 하나 둘 챙기고 있던 중에 지역농협에서 포전거래 제안이 들어왔다.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결국 우리는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오랜 시간 우리 사과를 기다려온 분들에게 미안함이 밀려왔다. 이제는 농장 상황을 잘 아는 분들에게서 “겨울 사과 나올 때 되지 않았나요”하고 묻는 메시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올해는 가정사로 잠시 쉬어갑니다”라고 답변할 때마다 ‘쉬어간다’는 말이 낯설고 어색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필요한 숨이었다.

농협과 거래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아이도 그대로 어린이집을 다닐 수 있고, 선별, 포장으로 하던 온 가족의 고생을 덜었고, 나도 추운 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손 비벼가며 택배를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 뜨악했던 건 한 번도 보지 못한 큰돈이 통장에 찍혔다는 것. 비록 사과 한 알, 한 알이 우리의 손을 거치진 못했지만, 그만큼의 시간과 체력을 내년 농사에 돌릴 수 있다는 게 위안이다. 포전거래로 한 번에 들어온 사과값은 안전하고 든든한 내년 농사 밑천이 됐다. 당장 한숨 돌릴 여유가 다음 해의 다짐으로 이어졌다.

가을비가 그치고 정선에는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짝꿍이 보내온 사과밭은 이미 겨울 준비를 마친 듯하다. 나는 구례에서 아이의 체육대회 준비로 분주하다. 낮에는 아이와 율동 연습을, 밤이면 정선의 밭을 떠올린다.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올해의 농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올해 사과는 우리가 직접 손에 쥐지 못한 만큼 아쉬움이 크지만, 언젠가 다시 택배 상자를 쌓는 날 지금의 이 ‘쉬어감’이 그 시간을 버티게 한 숨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 기다림과 포기의 사이에서 조금씩 단단해짐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