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가을장마가 남기고 간 불안한 밥상 앞에서

2025-10-26     최연희(충북 진천)
최연희(충북 진천)

농촌의 10월, 가장 분주하지만 가장 기쁜 계절이어야 한다. 논에서는 벼 수확이 한창이고, 밭에서는 김장배추가 알이 차며 겨울 양식이 준비된다. 그러나 올해 가을은 시작부터 느낌이 달랐다.

가을비가 아니라 가을장마라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며칠 간격으로 반복되는 비에 논밭은 말릴 틈도 없이 눅눅해졌다. 아침마다 맑은 가을 하늘 대신 먹구름 낀 물빛에 가까운 흐린 하늘이 반복되고, 길바닥 마를 틈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그러다보니 물 먹은 벼는 눕고, 김장배추는 숨이 막혔다. 콤바인은 들어가지 못해 수확 시기를 놓치고, 수분을 과하게 머금은 벼를 보고 있으면 품질 저하에 곰팡이 걱정까지 겹친다. 우리는 벼농사 대신 하우스농사를 택해 사람들이 벼 벨 걱정은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게 하우스 안 작물들도 이상한 가을 날씨에 당도는 오르지 않고, 나무도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다. 멜론이 막 자라는 8월, 9월은 너무 뜨거운 날씨였다. 그러다 갑자기 볕을 보지 못하는 습한 10월이 되니 거의 다 큰 멜론들의 과실이 마저 자라지 못하고, 맛있게 익을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더 애를 태우는 건 곧 시작되는 김장이다. 진천여성농민회 언니들과 나는 언니네텃밭 소비자분들에게 김장의 산물을 몇 년째 선보이고 있다. 좋은 배추와 양념거리, 손맛 덕에 매년 단골 소비자가 늘고 있지만 올해는 배추 작황이 가을장마로 좋지 않아 모든 농가가 걱정이다.

김장을 준비해야 하는 소비자들 문의는 벌써부터 쏟아진다. “올해 김장 괜찮을까요?”, “배추가 부족하면 예약 미리 받아야 하나요?” 뉴스에서 가을농사 소식을 접하고 농민보다 먼저 불안해하는 소비자가 많을 정도다.

논에서는 벼가 젖어가고, 부엌에서는 김장배추 걱정이 시작되며, 휴대폰에는 예약 문의와 재배 상황을 묻는 문자가 이어진다. 나는 요즘 밭에 서 있는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다. 농산물을 가공하면서 아이들 가을 체험도 진행해야 하고, 예약과 홍보, 그리고 가족의 밥상을 챙기는 일 등 매일 동시에 하는 삶이 버거울 지경이다.

그런 내게 올 가을비는 단순한 기상이변이 아니라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소비자들의 겨울양식, 아이들의 고구마캐기 체험, 직접 담아보는 김장체험 등 이 모든 것이 예약한 날짜에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이다. 농사의 실패는 올해 작물 피해를 넘어 다음해의 생계로까지 연결된다. 지금의 불안을 넘어 내년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기까지 하다.

농사로 끝나지 않는 농사의 삶, 그 복합적인 무게를 여성농민인 나는 이 10월에 매일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보다, 비가 더 올지도 모른다는 가정 아래 다음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아져 작물이 좋아지기를 바라기보다, 작물이 버텨낼 수 있는 방법을 더 먼저 찾아내야 한다. 기후는 점점 변덕스러워지는데 농민은 갈수록 단단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의 쌀과 배추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기후의 흔들림 속에서도 우리 밥상을 놓지 않은 사람들의 기록이다. 소비자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다. 단지 ‘가격이 오를까 봐 걱정하는’ 차원을 넘어, 이 밥상이 지켜지기 위해 어떤 계절을 지나오고 있는지를 한 번만 생각해주시길. 그 마음이 모일 때, 농민은 다시 한 번 어려운 농업환경 속에서 버틸 힘을 얻는다. 가을장마가 남기고 간 무거운 공기 속에서도, 우리 여성농민들이 끝까지 밥상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