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참빗 만드는 사람들⑦ 빗살, 오리나무 열매로 물들이다

2025-10-19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나라 땅이 남북으로 나뉘었다. 담양의 참빗 마을 향교리에 비상이 걸렸다. 마을회관으로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인자 어짤 것이여. 우리가 전답이 있어, 장사할 밑천이 있어. 참빗 맹글어서 간당간당 입에 풀칠하고 살었는디….

-광복이 됐다고 좋아서 태극기 들고 만세 불렀든 것이 엊그제 같은디, 그새 나라가 38선으로 딱 갈려 갖고 중국하고 왕래를 못하게 생겠으니…인자 무슨 수로 참빗을 맹글 것이여.

남북 분단으로 북행길이 막혔으니 만주 등지로의 판로가 막힌 것이야 또 그렇다 해도, 참빗을 만들 수조차 없게 됐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참빗 장인인 고행주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빗살을 적갈색으로 물들이는 데에 필요한 염료가 바로 중국에서 들여온, 호장근(虎杖根)이라는 약초의 뿌리라고 했잖아요. 이전까지는 한방 약재상에서 호장근을 구입해다가 사람의 오줌을 붓고 염색통에 넣고 끓여서 물을 들였거든요. 그런데 38선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으니….”

향교리 사람들은 호장근을 대신할 염색원료가 주변 야산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 믿고서 찾아 나섰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찾아냈다는데.

-어이, 자네 여그 조깐 와보소. 이거이 무신 나문가?

-그거 야막나무 아니라고. 어, 그란디 여그 낫으로 껍질을 상처 냈든 자리에 진액이 흘러나와서 부글거리는 것이 영판 요상하구먼.

-우리 여차보기로 요놈 껍질을 벗겨다가 오줌하고 끓여서 참빗 염색을 한 번 해보세.

-나도 시방 그 생각을 하고 있었구먼. 열매 색깔도 불그스름한 것이 잘하면….

“중국에서 들여왔던 호장근은 이미 동이 나서 구할 길이 없고…. 그래서 이산 저산 돌아다니다가, 야막나무 껍질을 벗겨 갖고 와서는 가마솥에 넣고 끓여서 시도를 해봤지요. 그랬더니 아, 이게 되는 거예요. 호장근보다는 못해도 그래도 엇비슷하게 색깔이 나오더라니까요.”

고행주씨가 말한 ‘야막나무’는 오리나무의 그 지역 사투리다.

요행히도 대체 염료를 발견했으니, 향교리 사람들은 너도 나도 마을 뒤편의 국유림으로 올라가서 오리나무의 껍질을 마구 벗겨댔겠다. 그러자 여기저기 벌거숭이가 된 채 말라 죽는 오리나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군청 산림계 직원들이 마을회관으로 달려와서는 호통부터 쳤다.

-참빗 염색한다고 뒷산에 있는 오리나무를 기냥 보이는 대로 껍데기를 홀라당 다 벳겨뿔면 몇 년 안 가서 멸종되고 말 것인디, 국유림을 아예 벌거숭이로 맹글 참이오!

-안 그라면, 참빗 맹글어 묵고 살어온 우리 향교리 사람들이 멸종되게 생겠는디 어짜라고?

-자, 자, 지들이 산림계에서 실험을 해봤는디 말입니다이, 오리나무 껍데기 말고, 열매를 가지고 염색을 해도 똑같은 색이 나온다는 것이 증명이 됐단 말입니다.

-그 말이 참말이여?

-진작에 갈쳐 주지 그랬어.

그리하여 참빗의 염료가 오리나무 열매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론 염색통에 소변을 부어서 끓이는 방식은, 화학 염료가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반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향교리 사람들이 참빗 만드는 일을 생계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특별나게 참빗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농사지을 전답도 없고, 다른 죽제품을 만들자니 재료 구할 밑천도 없는 빈한한 사람들이고 보니, 빈손으로도 할 수 있는 참빗 제조를 하게 됐다는 얘기다. 참빗은 만드는 과정이야 복잡하지만, 거기 들어가는 대나무 재료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밑천 없이도 누구나 덤벼들 수 있었다.

담양 장날이면 향교리 마을은 참빗을 팔러 나가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장터에 참빗조합이 있어서 조합진열대에 참빗을 놓고 팔았다.

“장날 아침이면 ‘동구리’라고 부르는 대나무 용기에다 참빗을 몇백 개씩 담아 넣고서 오일장터로들 몰려가지요. 아이고 수십 년 동안 참빗 팔러 다니면서 고생도 하고 영금도 많이 봤어요. 한겨울 눈길에 미끄러져서 빗을 몽땅 바닥에 쏟아버리기도 하고…. 그나마 다 팔고 오면 다행이지만 재수 없는 날은 단 하나도 못 팔고 돌아오기도 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