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장마부터 품종 변경까지… 파종 앞둔 국산 밀 첩첩산중
지난해 이어 올해도 가을철 잦은 비, 파종 전 배수 관리 비상 품종 변경 유인책 사실상 전무, 장려금·생산비 지원 등 필요
[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이른바 ‘가을장마’로 농작물 전반에 습해가 발생하는 가운데 파종을 앞둔 국산 밀 생산 현장에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벼와 콩 등 논에 심긴 작물을 수확한 뒤 이모작 동계작물 파종을 준비하는 때이지만, 9~10월 이어진 잦은 비로 곳곳의 논엔 모내기 때만큼 물이 차 있다. 실제로 지난 9월 강수일수는 15.1일(역대 2위)로 한 달간 이틀에 한 번꼴 비가 왔고, 이달 2~8일까지 강수량도 평년에 견줘 1.2배 많다.
논이 말라야 밀 파종을 위해 로터리와 거름 작업 등을 할 수 있으나, 현재는 발이 푹푹 빠질 정도라 곳곳의 생산지들은 파종 시기와 방법을 놓고 고심에 빠졌다. 아울러 파종 시기가 늦어지면 농작물재해보험 가입에도 지장이 있다. 파종 뒤 출현율(씨를 뿌린 뒤 흙 위로 싹이 나오는 비율)이 80% 이상 돼야 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데, 파종이 늦어지면 가입 기간을 놓칠 수 있어서다. 지난해 밀 재해보험 가입 기간은 10월 7일부터 12월 6일까지였으나, 지역에 따라 그때까지도 파종이 끝나지 않았거나 파종했더라도 싹이 나오지 않기도 했다.
이에 더해 올해는 품종 변경 이슈까지 터졌다. 정부는 ‘제1차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1차계획)’이 시행된 지난 5년 동안 보급을 확대했던 새금강(제면용 품종)이 업계 수요에 맞지 않는다며 돌연 제빵용 품종(백강·금강)으로 변경을 유도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생산 현장은 수요에 맞춘 품종 변경이 맞는 방향이긴 하지만 △왜 1차계획 때부터 제빵용 품종을 적극 보급하지 않았는지 △이미 많은 농가가 안정적으로 재배 중인 새금강의 수요처를 적극 발굴하지 않는지 △품종 변경 시 농가 부담이 큰 데도 관련한 지원 방안이 거의 없고(1kg당 수매단가 제면용 950→900원, 제빵용 1000→1015원 각각 증감) △심화하는 기후변화에 대응한 품종개량 및 재배 매뉴얼 보급 방안이 없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특히 파종기에 잦은 비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배수시설 지원 확대도 필요하다. 최용범 구례밀영농조합법인 본부장은 “가을철 잦은 비로 파종을 경운방식(땅을 갈아 씨 뿌리기)으로 해야 할지 입모종(모종 심기)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다. 굴삭기를 동원하거나 무굴착 배수시설이 시급하지만, 비용 문제로 농가에만 맡기기엔 어려워 관련 지원이 더 필요하다”라며 “밀 자급률을 놓고 생산량, 품질 적성만 이야기했지 파종 및 재배 방식, 기후변화에 따른 품종 고민은 거의 없어 이에 대해 농촌진흥청이 장기 전략을 내놓아야 할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전남 장흥도 잦은 비로 지난해부터 어려움이 컸다. 장흥은 보통 11월 5일쯤 첫 파종을 하는데, 지난해엔 잦은 비로 땅이 젖어 있어 12월 25일에서야 95% 정도 파종을 마쳤고, 일부 농가는 파종을 포기했다가 1월 11일에야 파종하기도 했다. 다행히 장흥은 따뜻한 기후라 파종이 늦어졌어도 큰 무리 없이 수확할 수 있었다.
안선권 햇살농축산영농조합법인 대표는 “1월에 파종했어도 정상적으로 수확했다. 이젠 날씨를 두려워할 게 아니라 변화한 날씨에 적응해야 한다”라며 “각 지역에 맞는 매뉴얼을 농진청이 만들어 주면 농민들이 편할 텐데 여전히 없다. 우리 작목반은 재배·파종 매뉴얼을 따로 만들어 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안 대표는 농민들이 낮은 수매가에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비 상승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적극 보급해 온 품종을 갑자기 바꾸라고 하면 농가 고충만 더 커진다고 지적했다. “수요처가 찾지 않는 품종을 보급해 놓고, 지난 5년간 성과가 없으니 하던 거 줄여야 한다면서 정작 그에 따른 피해를 책임지지도 않으니 결국 농민만 피해를 본다. 또한 농민이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 자연에 순응하는 게 농민들인데 하다못해 유류비라도 더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비가 많이 와서 로터리 한 번 칠 걸 두 번 이상 쳐야 하니 기계 닳고 기름 더 들어가고 생산한들 뭐가 남겠나. 그러니 고생할 바에 돈도 안 되는 거 안 하는 게 낫다고들 하는 거다.” 안 대표가 전한 현장 상황이다. 면세유류 등 생산비 지원을 늘리고, 품종 변경 유도를 위해 제빵용 품종 수매가를 실질적으로 인상하면 농가들이 품종을 바꿔 재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 보급종인 새금강 처리대책이 사실상 전무한 것도 문제다. 올해 전체 수매량의 78%를 차지하는 새금강에 대한 업체수요는 12%(2024년 기준)에 그친다. 농가는 새금강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기후에도 잘 적응하는 품종이라 재배를 선호해 왔다. 국산 밀 시장 자체가 매우 작은 상황에서 그나마 수요가 있는 편인 제빵용 품종을 확대하는 것이 근본적으론 맞는 정책 방향이긴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농가 부담을 줄이면서 품종 변경을 추진할 것인가란 점이다.
이에 대해 최용범 본부장은 “자급률 제고나 농가소득을 고려한다면 품종 변경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새금강의 용도를 더 발굴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안선권 대표는 “30년도 넘은 금강 외엔 제빵용 품종이 거의 없다는 건 그간 농진청이 품종개발과 개량에서 전혀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증거다. 1차계획 시작 때부터 업계가 찾는 밀을 생산하도록 해야 했다. 기능성 밀인 황금알도 있으나 특허 종자라 농민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이대로면 수매업체들이 ‘이제부터 새금강은 안 받는다’라고 현수막을 내걸 날이 올 수도 있다”라고 우려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품종 변경에 따른 장려금, 기능성 고품질 밀 품종 개발·보급, 지속적인 농가 교육 컨설팅과 관련 지원(기계 지원 등)이 필요하다. 특히 안 대표는 교육 컨설팅의 경우, 농가 필요에 따른 단계별 과정을 마련해 밀 농가의 지속적인 성장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