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졸고 있는 자치체’에서 벗어나야

2025-09-28     하승수 대표
하승수 대표. 변호사 및 공인회계사. 199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현재는 농촌·농업·농민을 옹호하는 공익법률단체인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예산감시운동 단체인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농촌지역 행사장에 가면, 자신의 치적을 늘어놓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지방의원들을 보게 된다. 무슨 사업을 했고, 중앙정부나 도청에서 예산을 얼마 따 왔고, 자기 지역구에 얼마의 예산을 가져왔고 등등….

그러나 그렇게 치적을 많이 쌓았는데, ‘왜 지역의 인구는 줄어들고 빈집은 늘어나고 있으며, 의료·교육·교통 등 생활 기반은 위축되고, 젊은 사람들은 지역을 떠날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천편일률적인 축제나 일회성 행사에 쓰는 예산은 늘어나는데, 농촌지역의 병원·약국은 문을 닫고 있고, 면 소재지 학교마저 폐교 위기를 맞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선출직이나 공무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선출직이나 공무원들도 많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데도 농촌지역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고 지역의 활력이 줄어들고 있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앞선 자치체’와 ‘졸고 있는 자치체’

일본의 지방자치 이론가인 마쓰시타 게이이치(松下圭一)는 1996년 펴낸 <일본의 자치·분권>이라는 책자에서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을 비교하면서 ‘앞선 자치체(先驅自治体)’와 ‘졸고 있는 자치체(居眠り自治体)’라는 표현을 썼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이 지난 다음,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을 비교해 보니 지방자치단체 간의 격차가 그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똑같은 지방자치법의 적용을 받고 있고 거의 공통된 권한·재원의 틀 내에 있으면서도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계획을 세우고 정책·제도를 개발한 개척자적인 지방자치단체(앞선 자치체)가 있는가 하면, 중앙집권체제에 스스로 안주해서 중앙정부가 정한 지침대로 행동하고 시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지방자치단체(졸고 있는 자치체)도 있다는 것이다.

매우 따끔한 얘기이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그리고 선출직이 되고자 하는 후보자들이 들어야 할 얘기이다. 한국의 농촌지역 지방자치단체들을 보면 마쓰시타 게이이치가 얘기한 ‘졸고 있는 자치체’가 떠오르는 것이 현실이다. 지역 실정에 맞는 실효성 있는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허황된 문서만 생산하고 있거나 지역 실정도 잘 모르는 외부 용역업체들에게 계획 수립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중앙정부에 대해 ‘할 얘기’는 하지 못하면서, 지역 내부에서는 독선과 전횡을 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지금 경기도 용인에 들어서려고 하는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때문에 전남, 전북, 충남을 관통하는 여러 개의 34만5000볼트 송전선이 추진되고 있는데도, 그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는 지방자치단체장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면서 지역에서 독단적으로 행정통합을 추진하면서 갈등과 혼란을 일으키는 지방자치단체장들도 있다.

지금 한국의 현실을 보면, 지역 특성에 맞는 정책을 개발하고 조례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들은 매우 드물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농촌지역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현실적이고 타당성 있는 조례를 만들거나 정책을 개발하는 선출직(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의미하는 것이다)이나 공무원들도 있다.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기보다 주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출직이나 공무원들도 비록 소수지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지방선거 때에는 거대정당의 공천을 받느냐가 중요하고, 선거 당시의 정치 상황이 어느 정당에게 유리하냐가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지방자치단체장이 기존의 혁신적인 정책을 폐기해버리면 그나마의 성과조차도 사라지는 경우도 보게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여기가 앞선 자치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한국의 농촌지역 지방자치단체들을 보면 ‘졸고 있는 자치체’가 떠오르는 것이 현실이다. 중앙정부에 대해 ‘할 얘기’는 하지 못하면서, 지역 내부에서는 독선과 전횡을 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지금 경기도 용인에 들어서려고 하는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때문에 전남, 전북, 충남을 관통하는 여러 개의 34만5000볼트 송전선이 추진되고 있는데도, 그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는 지방자치단체장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지난 17일 전남 나주시 한국전력공사 본사 앞에서 열린 ‘고압 송전선로·철탑 건설 반대! 영암군민 궐기대회'에서 한 주민이 ‘농촌은 도시와 기업의 전기식민지가 아니다'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한전을 규탄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참여의 부재가 ‘졸고 있는 자치체’ 만들어

선출직에게 특출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주민 참여를 잘 보장하는 선출직이 가장 유능한 선출직이다. 농촌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농촌지역의 실정을 잘 아는 것은 주민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정책을 만들고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성과를 내는 방법이다. 그리고 주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려면, 읍·면으로 들어가고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단체나 이장에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민들이 직접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공무원들이 일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하향식 의사전달구조에서 상향식 의견수렴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국에서도 ‘앞선 자치체’들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직원 참여도 중요하다. 공무원이나 지역의 공공기관,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관료적인 지침과 지시에 따라 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창의성은 자율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행정조직 내부에서도 수평적인 의견교환이 가능해야 한다. 지금 맡고 있는 업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관심 분야 정책이나 사업에 대해 공무원이 의견을 낼 수 있고, 토의에 참여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역량이 쌓일 수 있다. 공무원들의 학습모임도 장려해야 한다. 민간을 들러리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민-관이 실질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공론장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최악의 지방자치단체장은 ‘제왕적 지방자치단체장’이다. 개인적으로 유능하냐 무능하냐는 의미가 없다. 지역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면서, 공천권자나 중앙정부 눈치 보기를 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이 최악이다. 이런 지방자치단체장일수록 주민들의 의견을 경청해서 정책을 만들고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나 측근들의 생각대로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비리와 잡음이 발생한다. 난개발이나 전시성 사업을 벌이는 데 치중하다 보면, 정작 주민들이 애써 만들어 온 사업, 지역의 특성을 살린 사업은 무시되거나 소외된다. 지역의 중·장기적인 비전도 실종되기 쉽다.

지방자치단체장도 중요하지만, 공무원 한 사람 한 사람도 중요하다. 마쓰시타 게이이치의 표현에 따르면, 서기형(書記型) 공무원이 아니라 기획가형, 연출가형 공무원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을 잘 알아야 한다. 지역 실정에 맞지 않는 계획·정책은 세금만 낭비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농촌지역 공무원 중에는 지역에 살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이웃 도시에서 출퇴근하는 것이다. 물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으니,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지역에 살지 않으면, 지역에 대한 이해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만회하려면, 지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지역에 대한 공부를 더 많이 하고, 특히 면 지역 주민들의 얘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런 공무원이 농촌에 도움이 되는 행정을 하기는 어렵다.

벗어나야 할 청부형 문제해결 방식

한편 주민들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농촌지역이 빠져 있는 ‘청부형 문제해결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민들도 노력해야 한다. ‘청부형 문제해결 방식’이란 개인·마을·지역의 문제를 연줄이나 비공식적인 영향력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논의보다 연줄에 의한 문제해결 방식을 선호하다 보면, 의사결정이 왜곡되기 쉽다. 예를 들어 우리 읍·면에 A라는 일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데, 연줄을 통해서 B를 먼저 해 달라고 하면 의사결정이 왜곡되는 것이다. 또한 우선순위로 따지면, 한참 후순위의 일을 연줄을 통해서 1순위로 만들면 의사결정이 왜곡되는 것이다. 필요하지도 않은 사업, 타당하지 않은 사업을 하게 만드는 것은 최악이다.

그래서 ‘청부형 문제해결 방식’이 아니라 ‘참여형 문제해결 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틀로 만들어진 것이 주민참여예산, 주민자치회와 주민총회 등의 제도이다. 지역에 필요한 일들을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제안하고, 우선순위를 공개적으로 논의해서 결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방자치단체 간에도 선의의 정책경쟁이 필요하다. 중앙정부로부터 ‘예산 따오기’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혁신과 정책·제도개발의 경쟁이 돼야 한다. 한 지방자치단체 내에서도 읍·면 간에는 선의의 경쟁이 가능하다. 읍·면이 자기 특성에 맞는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자기 읍·면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경쟁이 그것이다. 그런 읍·면의 노력들이 모여야 더 살기 좋은 시·군이 만들어질 수 있다. 2026년 지방선거를 전후해서 이런 변화의 움직임들이 많이 일어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