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책임수매, 특단 소비대책’ 없인 국산 밀 미래 어두워

기후변화로 생산기반마저 날로 취약해지는데 수매가 수년째 제자리…“돈 안 돼” 농가 이탈 주력 품종 선정부터 잘못…적격 품종은 ‘금강’

2025-09-14     김수나·장수지 기자

[한국농정신문 김수나·장수지 기자]

밀 자급률 제고를 위한 정부의 ‘제1차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에 대해 농민들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했다. 거의 변함없는 밀 자급률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고도 강조했다. 지난 8일 충남 논산의 한 정미소 저온창고에 올해 수확한 밀이 톤백에 담겨 쌓여 있다. 한승호 기자

‘제1차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1차계획)’은 실패했나? 현장의 답은 자명했다. ‘애초부터 실패는 예견됐다’는 것이다. 지난 5년간 생산량 증대에 골몰했던 정부는 돌연 비축재고 부담이 높고, 국산 밀이 제빵용을 선호하는 업계 수요와 맞지 않은 데다 품질도 낮다며 “수요자 중심(8월 26일 현장의견 청취 간담회)”의 개선안을 들고나왔다. 이에 대해 각 지역에선 “맞지만 틀렸다”라고 꼬집었다.

국산 밀은 소비 부진만이 문제가 아니어서다. 그간 정부가 사실상 소비 대책에 손 놓다시피 해서 결국 기존 생산량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마당에 현장에 갑자기 품종 변경(제면용→제빵용)과 품질향상이라는 버거운 숙제만 던지고 있어서다. 지금은 품종 변경에 골몰할 게 아니라 품종별 수요처 확대와 생산기반 유지·강화에 더 강력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밀 생산·소비 정책이 함께 가야 하는데 현재 정책은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이란 지적이다.

농민 A씨(충남 논산)는 “밀 품질은 블렌딩(여러 특성의 밀을 혼합·제분)으로 최적화하는데 지금 생산량으론 어렵다. 결국 생산기반·생산량 안정화와 품질 제고는 같이 가야 하는 문제”라며 “현장은 생산도 어렵고, 생산 물량마저도 처리하기 힘든데 정부는 명확한 소비 대책 없이 품질향상까지 요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부가 밀려는 제빵용 생산단지는 괜찮나? 지난 4년간 제빵용만을 생산해 온 전남 함평군 생산단지 관계자는 기후변화로 품질이 떨어지는 가운데 겨우겨우 단백질 함량을 맞춰도 등급 기준이 강화돼 정부가 수매하지 않은 물량을 처리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고 있다고 토로했다. 3등급 이상 전량수매와 전략작물직불금 상향 없인 밀 농가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열악함이 더해 가는데 품질 좋은 밀을 생산해야 하고 판로까지 개척해야 하는 ‘삼중고’에 놓인 농가들이 얼마나 버틸지, 밀 농사에 대한 동력은 대체 어디에서 얻어야 하는지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소비부터 활성화한 다음 생산을 맞춘다는 방향인데, 그 기조대로라면 아마 생산은 저물고 나서일 거다. 일단 돈이 안 된다. 이모작으로 전략작물직불금을 받지만 이마저도 현실적이지 않다(현재 ha당 100만원→200만원 이상 상향 요구). 밀을 포기하는 농가가 많다.” 한 국산 밀 농업법인 관계자의 말이다. 1차계획은 소비대책뿐 아니라 생산기반 안정화마저도 실패했단 뜻이다.

그는 이어 말했다. “정부 역할은 생산자들이 생산에 주력할 수 있게 하고, 소비 확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 또 정부는 생산량이 늘지 걱정하겠으나 사실상 지금으로선 생산량이 급증할 기반도 안 된다. 진짜 우려할 상황이 오면 지역별 면적 상한을 두는 등 방안을 찾아야지 소비 확충이 언제 될 줄 알고 계속 기다리나? 그 전에 생산 기반이 사라질 거다.”

불충분한 수매, 생산단지에 부담 가중

농식품부는 지난 5년간 국산 밀 수매·비축량만으로도 허덕이는 실정이지만 이는 앞선 지적처럼 생산·소비 정책을 균형 있게 시행하지 않은 탓이다. 사실 밀 수요는 차고 넘친다. 우리 국민은 매년 밀 210만여톤을 먹는다(지난해 1인당 밀 소비량 36.5kg). 소비량으론 주식인 쌀 다음을 차지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소비량의 약 99%가 수입 밀이란 것이다. 밀 자급률은 지난 2020년 0.8%에서 2023년 2%까지 반등했다 지난해 다시 1%로 주저앉았다. 농식품부 담당자는 올해 역시 1%대로 내다봤다. 이는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는 명목 자급률이라 실질 자급률(실제 소비량 기준)로 따지면 자급률은 더 낮아진다. 최근 3년간 정부 국산 밀 매입량은 매년 1만7800톤 정도인데 같은 기간 방출량은 4000~6000톤에 그쳤다. 나머지는 창고 신세란 의미다. 정부가 국산 밀 소비 대책을 간과한 결과가 여실히 드러나는 지표다.

이에 현장에선 지난 5년간 정부가 적극적인 수매와 소비 활성화에 나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 왔다. 생산 기반 유지조차 힘든 가운데 판로마저 태부족인 구조에서 제빵용·제면용 구분 말고, 현재 생산량이라도 충분히 수매해야 그나마 생산 기반이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생산 현장은 수매가 안정적이고 가격이 좋아야 생산 동력을 얻고 밀을 포기하지 않아서다.

한 농민이 올해 수확한 밀을 두 손에 올려 살펴보고 있다. 밀 농사 또한 최근 지속된 기후위기로 인해 품질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이 뒤따랐다. 한승호 기자

첫 단추부터 잘못된 계획, 이행 과정도 엉망

현장 농민들은 1차계획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했다. 5년 전과 비교해 전혀 오르지 않은 자급률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예견된 미래였다고 덧붙였다. 소비 대책 없이 무조건 생산만 늘린 정부가 5개년 계획 이전보다 국산 밀 시장을 어지럽혔다는 의견도 나왔다.

안선권 햇살농축산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정부의 1차계획이 실패할 것이라고 시작부터 장담했다. 기본적으로 현장의 의견과 상황이 전혀 반영되지 않아서다”라며 “바뀌고 또 바뀌는 인사이동에 5개년 계획을 중장기적으로 이끌 담당자가 부재했고 소비를 고려하지 않은 품종의 생산까지 부추겨서 계획은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 농민들에게 밀 생산을 장려하기 전에, 필요 없는 곳에 예산을 쏟아부으며 낭비하기 전에 현장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현장 의견을 청취해 정책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안 대표에 따르면 1차계획의 가장 큰 오점은 소비가 늘기 어려운 품종(새금강)의 생산을 확대한 데 있다. 이에 밀 재고가 쌓이게 됐고 자급률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이다. 아울러 최근 정부는 이를 타개할 방안으로 제빵용(백강) 품종 생산 확대를 고려 중인데 안 대표는 이 또한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안 대표는 또 1차계획이 끝나가는 현재까지도 안정적 생산을 위한 재배 매뉴얼조차 지역에 맞춰 마련돼 있지 않고 매년 심화하는 기후위기에 대응할 대책은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며 탄식했다.

이밖에 정부의 타작물 재배 정책에 맞춰 1차계획의 큰 틀이 흔들린 것에 대해서도 지적이 잇따랐다. 수년째 제자리인 밀 수매가격만으론 소득을 담보할 수 없는 만큼 농가로선 이모작 재배가 필수인데, 밀 수확 후 벼 대신 논콩 등을 재배하게끔 여건이 바뀐 탓에 생산의 어려움마저 가중됐다는 것이다. 벼는 논에 물을 채워 바로 심을 수 있지만 논콩은 강우 영향을 크게 받아 파종부터 쉽지 않고 벼보다 재배도 까다롭기 때문이다.

2차계획, 어떤 내용 담아야 할까

밀 농가들은 나아지지 않는 소비 여건과 정부의 부실한 대응으로 현재 생산마저 위축될 위기에 놓인 만큼 소비와 생산 각각의 전략을 제대로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점차 까다로워진 수매 조건을 현장 상황에 맞게 개선하고 생산 전량을 수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국산 밀 생산이 지속될 수 있게 수매단가 및 직불금 인상 등의 조치도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도 우세했다.

아울러 한계에 다다라 생산자에게까지 지워지고 있는 소비 문제 또한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남 장흥에서 법인 소속 농가들과 금강(제빵용) 품종을 재배 중인 안선권 대표는 “30년도 더 된 종자지만, 금강 밀은 단백질 함량이 평균 14%에 다다를 만큼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소비처에서도 이런 밀이 있었냐며 놀랄 정도다”라며 “제빵용, 제면용 품종별로 구분하며 복잡하게 하지 말고 제면은 물론 제빵까지 가능한 금강 품종의 생산을 확대하는 게 맞다. 블렌딩이니 뭐니 괜히 또 예산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생산기반을 강화할 수 있도록 교육·컨설팅을 개선하고 지원사업도 현실에 맞게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덧붙여 새금강 대비 부족한 금강의 생산량을 정부가 보조한다면 생산이 크게 늘어날 수 있으며, 소비로 이어진다면 자급률이 가까운 시일 내 상승할 수 있을 거라 내다봤다.

한편 현장에선 1차계획의 부실함 중 하나로 꼽히는 이상기후 대응 강화 필요성도 언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