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간판·간판장이⑦ ‘만원광고사’ 사장이 되다

2025-08-17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이강연이 부산에서 ‘아크릴 간판 제작법’이라는 신기술을 배워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가 1975년 가을이었는데, 그 시기에는 충청도 대천에도 간판집이 꽤 여러 군데 들어서서 성업 중이었다. 이강연은 대천의 모든 간판 기술자 중에서 단연 높은 대우를 받았다. 간판장이 동무인 이성용이 달려와서는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너 부산인가 어디 갔다가, 간판 속에다가 개똥벌렌지 뭣인지 하는 것을 집여옇는 기술을 배와 왔다는 소문이 있든디…사실인겨?

-그려. 개똥벌레 고놈을 속에다 여놓으면 섣달그믐 밤에도 훤하게 잘 보인다니께, 허허허허.

당시만 해도 통신은 물론 교통 사정 역시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강연이 부산에 가서 배워온 아크릴 간판 만드는 기술은, 대천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외래 문명이었다.

조수 시절에 그를 아주 모질게 부려먹었던 ‘뉴-선전사’의 주인은, 자신을 뛰어넘는 기술자가 되어 돌아온 이강연을 보물처럼 아끼고 받들었다. 역시 설움은 견뎌낼 만한 가치가 있었고, 기왕에 기술을 배울 바엔 견문을 넓혀서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터득할 필요가 있었다.

대천으로 복귀하고 나서 너덧 달이 지난 어느 날,

-내일은 서울로 자재를 사러 가야 쓰겄는디, 나하고 같이 좀 갔으면 좋겄구먼. 시방 쩌어그 대천 해수욕장에 식당이며 술집이며 요정까지 막 들어서 갖고 간판 주문이 밀려 있다니께.

주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 이강연이 장갑을 벗어서 작업대에 올려놓고는 나직이 말했다.

-주인아저씨, 그동안 가르쳐 준 것, 고마웠구먼유.

-어째 그려? 아, 다른 간판집에서 자네를 그 뭣이냐, 스, 스카우트 할라고 야단들이라더니 딴 집으로 갈라고 그러는겨? 내가, 월급을 배로 올려 달라고 하면 올려 줄 것이니께….

-그것이 아니구유, 가진 것은 없지만, 지도 인자 독립을 해서 가게를 따로 채려볼까 해서유.

-뭐, 그렇다면야….

주인이 쩝,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해서 이강연의 홀로서기 간판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세를 얻었는데, 기껏해야 한 평 반이나 될까 말까, 바닥에 함석 두 장 깔아놓으면 꽉 찼어요.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3만원이었거든요. 그때 마침 친구들하고 계를 조직했는데, 내가 사정 얘기를 하고 1번으로 곗돈을 타서 보증금 30만원을 장만했지요. 간판 가게 그거 하는 데에 소용되는 장비라야 별 것 없어요. 펜치하고 망치만 있으면 됐으니까, 허허.”

비록 협소하고 초라한 가게였지만 간판장이로서의 포부는 대천 앞바다만큼이나 원대했으므로, 상호만은 그럴듯하게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처럼 근사한 이름이 떠올라 주지 않더라고 했다. 모조지 전지 한 장을 바닥에 깔아놓고는 그럴싸한 이름을 짓느라 골몰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맘에 드는 이름이 안 떠올라요. 고민 고민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해서 툭 던진 이름이 ‘만원’이었어요. 일만 만(萬)에 둥글 원(圓). 지어놓고 보니 그럴듯해요. 물론 사람들한테야 ‘일금 일만원(一金一萬圓)’이라고 읽히겠지만, 저는 그런 뜻으로 풀이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생각으로는 만이라는 글자를 많다, 크다, 꽉 찬다, 넘친다, 그런 뜻으로 풀이했어요. 원은 글자 그대로 둥글다는 의미니까 둥글고 크게 살면서 돈도 수백만, 수천만원 넘치게 많이 벌자…꿈보다 해몽이 그럴듯하지요? 하하하.”

그래서 이강연이 차린 간판집 이름이 ‘만원광고사’가 되었다. 그는 ‘만원’이라는 두 글자에다 둥글다, 크다, 원만하다, 너그럽다, 돈을 억수로 많이 번다…따위의 의미를 한참이나 더 길게 보탰다. 까짓것, 그 한문글자에 그런 뜻이 없으면 또 어떤가. 그가 그렇게 믿고 있는 바에.

드디어 광고 영업이 시작되었다.

간판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 하나 더 있었다. 외국말로 ‘플래카드’라고 부르기도 하는 현수막이 그것이다.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다후다라고 하는 하얀 천이 있어요. 그놈을 주욱 늘어뜨려서 양쪽을 묶어놓고는 페인트에 안료를 섞어서 붓으로 써야 돼요. 물론 연필로 글자 수에 맞춰서 칸을 나눈 다음에….”

그런데 당시엔, 개인은 현수막을 내걸 수 없었으므로, 주 고객이 관공서였다는데…무슨 글자들이 공중에 내걸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