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녘은] ZERO to ONE

2025-06-01     김일한 동국대 DMZ평화센터 연구위원
김일한 동국대 DMZ평화센터 연구위원

 

ZERO to ONE.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 미국의 테크기업 팔란티어 창립자 피터 틸(Peter Thiel)이 혁신적인 스타트업 기업의 창업정신을 강조하면서 사용한 개념이다.

남북관계가 냉전시대를 방불케 하는 긴장상태다. 둘 사이에는 상호불신과 적대를 부추기는 징후들이 넘쳐난다. ‘핵은 핵으로 막아야 한다’는 위험천만한 막말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활로는 암울하기만 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자리는 미래지향적이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한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된다. 대통령선거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은 분단 55년 만에 반목을 딛고 얻어낸 성과였다. 당시를 되돌아보자. 1997년 김대중정부가 출범한 직후 1998년 6월 동해에서는 잠수정 사건이, 1999년 6월 서해에서는 제1차 연평해전이 발발했다.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남북한은 대화를 선택했다. 대결과 충돌로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힘이었다. 이후 진행된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도 남북 간 갈등이 매우 높은 시기에 진행됐다. 남북한과 북미 사이에 열린 모든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정치적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진행됐다.

갈등과 반목, 그리고 고도의 긴장감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남북관계는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접경지를 넘나드는 전단지 살포와 저주에 찬 확성기 방송을 당장 중단하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통신선부터 복원하자. 이를 계기로 군사분계선의 군사충돌 가능성을 막기 위해 남북한이 합의한 9.19 군사합의도 제자리로 돌려놓자. 특히 9.19 군사합의는 남북한 양측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한반도 평화를 견인하는 유일한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힘들수록 과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난 2023년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했다. 두 국가든 한민족이든 상대를 겨누는 적대의 칼날을 거두는 것에서 새로운 남북관계를 다시 설계하자. 남북 최초의 정상회담인 6.15 공동선언은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반목을 제거하는 노력에서 시작됐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제안한 대북정책 3원칙, 즉 무력도발 불용, 화해·협력 추진, 흡수통일 배제는 새로운 남북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올해로 남북한이 분단된 지 80년이 됐다. 광복을 맞이한 지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한강 작가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한반도의 과거가 미래의 남북한에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과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막연히 과거로 돌아가 당면한 갈등과 위기를 회피하는 수준의 남북관계를 염두에 둬서는 안 된다. 임기응변식 봉합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 있어서다.

피터 틸이 말하는 ZERO to ONE은 과거의 유산에서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미래의 창조물을 상상하고 끝내는 만들어내는 역량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필요하면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남북관계를 기획하고 설계하자. 80년도 기다렸다. 서두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