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㊼] 다시 가볼 시장으로 ‘저장’, 울진오일장
북쪽 지리산 뱀사골에서 오일장이 서는 울진 바지게시장엘 가려면 꼬박 4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일행들과 10시에는 만나자 했으니 아침 6시에 출발하기로 마음을 먹고 잠을 청했지만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일어나 밖을 보니 온 세상이 다 눈으로 덮여있다.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나선 시간이 4시를 조금 넘겼다. 차에 올랐으나 엄두가 나지 않아 오늘의 오일장 방문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일어난다. 적설량이 이미 5cm를 넘어선 도로에 길을 내며 눈을 부릅뜨고 아주 천천히, 조심해서 운전을 한다. 통행이 빈번해서 눈이 녹고 얼면 더 미끄러울 텐데, 내가 길을 내며 가는 운행이라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차선을 바꾸는 앞차와 아찔하게 추돌을 피하기도 하고 터널 안에서 접촉사고가 난 차들을 보면서 많이 긴장하고 가다보니 울진까지 6시간을 넘게 운전을 했다. 그나마 정말 다행으로 영덕을 지나면서 눈이 멈추고 울진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기온도 제법 올라가 걸을 만했다.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사진작가님, 그리고 우리 강사님들 모두 아주 약간만 늦게 다들 그 험한 길을 뚫고 무사히 오셨다. 이 여정에 꼭 참여해야 하는 사람은 나와 사진작가님인데, 제철음식학교 강사님들이 지역의 식재료 공부를 해야 한다며 늘 동행을 하신다. 덕분에 나도 이야기를 나누며 더 알찬 오일장투어를 하는 중이다.
다들 허기를 느끼고도 남을 시간이라 시장 근처의 국밥집 앞에서 서성거리니 안에서 손님들이 문을 열어주며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을 하신다. 너무 맛있는 집이라며 염소탕을 권하신다. 특이하게도 통영의 ‘볼락깍두기’와 비슷한 형태로 배추김치를 담아 주셨다. 생김새가 볼락 같아서 볼락이냐 여쭈니 볼락은 아니고 강원도말로 뭐라 하셨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어쩌면 횟대기를 넣으신 건가 하는 상상을 하지만, 아무튼 나는 이런 김치가 정말 좋다. 지역의 색이 담기는 김치를 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는 건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던 울진오일장이 서던 날은 마침 대보름날이었다. 내 짧은 생각들은 오일장 당일이니 반찬 팔러 나오신 분들이 갖가지 나물들이라도 들고 나오시려나, 대보름 찰밥을 구경할 수 있으려나, 아니면 묵나물들이라도 만날 수 있겠지 하는 것이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지난 장에는 상인들과 손님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많이 아쉬웠다. 날이 흐리고 추운 것도 한몫 한 것 같다.
대보름을 지내고 나면 장을 담글 시절이라 그런지 상인들의 팔 물건 앞에 메주들이 놓여있다. 장이 한산해도 메주를 만나니 나는 신이 난다. 강원도에 인접한 경북의 울진이라 강원도의 막장거리가 나와 있는 것도 좋았다. 청국장도 말려서 들고 나온 것이 있었다. 대책 없이 사고 싶은 욕구를 생기게 하지만 참는다. 이미 준비해 놓은 메주들이 산더미라.
강원도 장의 특색 중 하나가 이런저런 나물들을 다 한데 모은 '잡나물'을 파는 것인데 안동에서 시집왔다 하시는 상인이 쓴나물들에 별꽃, 냉이 같은 걸 섞어 들고 온 것이 보인다. 어린 시절 엄마 따라다니던 생각에 갑자기 울컥해져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오일장이 서는 바지게시장 바로 옆이 수산시장이다. 동해를 끼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수산시장의 규모가 제법 크다. 2월의 울진시장엔 참문어, 가오리, 참가자미, 물가자미, 골뱅이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수에서 시집왔다는 나이든 상인은 자기 고향이 여수지만 울진의 참문어만한 맛이 없다 하신다. 같이 웃었다. 결혼을 하면서 고향을 떠나 남편이나 자식과 꾸리는 삶의 현장이 바뀌면 이렇게 되기도 하는구나 하는데 공감하는 웃음이었다. 누구 한 분 빠지지 않고 친절하다. 해산물 잘 모르는 우리 일행을 위해 설명도 자세히 해주시고 사진도 찍도록 도움을 주신다.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아 또 지갑을 연다. 나물 한 바구니 앞에 놓고 떨고 계시니 사고, 반가운 식재료를 만나니 사고, 먹고 싶어서 샀다. 바위에 붙은 것을 뜯어말렸다는 돌김이 정말 그랬다. 안 팔리면 남편 주려고 했지만 팔려서 좋기도 하고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하다던 상인이 인상적이었다.
강원도에서 살 땐 말린 생선을 주로 조려 먹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쪄서 먹기도 했지만 경상도 분들이 말린 생선을 쪄서 먹는 사랑에 비하면 택도 없는 것 같다. 수산시장 여기저기 가자미와 홍어, 가오리, 코다리, 물곰을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본다. 호남지역에서 홍어를 삭혀 먹는 것에 진심이라면 영남지역에서는 상어고기를 삭혀 먹는 문화가 있다. 같은 생선을 먹는데 먹는 방법이 다르고, 다른 생선인데 저장(삭힘 포함)해 먹는 방법이 같기도 하다. 지역의 식문화를 공부하는 재미다. 작은 시장이었는데 날씨도 안 좋고 대보름날이어서 사람들은 적었지만 그냥 좋았던 시장이었다. 정말이지 어린 시절 어른들을 따라다니던 시장 같은 느낌이라 약간 어린아이처럼 묻고 배우고 떠들고 다녔다. 날 좋은 언제인가 다시 가볼 시장으로 저장해둔다.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지리산 뱀사골 인근의 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제철음식학교에서 봄이면 앞마당에 장을 담그고 자연의 속도로 나는 재료들로 김치를 담그며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해 50여 가지의 밥을 한다. 쉽게 구하는 재료들로 빠르고 건강하게 밥상을 차리는 쉬운 조리법을 교육하고 있다. 쉽게 장 담그는 방법을 기록한 ‘장 나와라 뚝딱’, 밥을 지으며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밥 짓는 법과 함께 기록한 ‘밥을 짓다, 사람을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