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농사를 지으렵니다”
도끼자루 나무는 어떻게 베나
이 도끼 아니면 베지를 못하네
아내를 얻으려면 어떻게 하나
중매가 아니면 얻지를 못하네
도끼자루를 베자 도끼자루를 베자
도끼자루의 본보기는 멀지 않구나
이 시악시를 이제야 만나보니
음식 솜씨가 그만이구나
『시경(詩經)』「빈풍」편의 벌가(伐柯)였다. 희옥이가 노래를 마치자 억구지는 박수를 치면서 춤도 추라고 외쳤다. 합장하듯 손을 모은 희옥이가 두루미처럼 고개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장작불을 돌았다. 그 모습에 억구지가 윗통을 벗고 합세하며 끼악끼악 괴성을 질렀고 기범이가 뒤에 붙어 같은 짓거리를 반복하였다. 목젖을 움찔대며 한 사발 비운 병호가 스승을 만나느라고 차렸던 복장을 벗어 던졌다. 그때쯤 희옥이는 바지까지 훌러덩 벗어 던져 샅 사이로 시커먼 덩어리가 덜렁거렸다. 병호가 일행 속에 끼어들자 허허허 웃던 필상이 거추장스러운 것을 벗어던졌다. 마치 탑돌이를 하는 것 같았는데 처음에는 윗통만 드러낸 사내들이 한 바퀴 두 바퀴 돌아오자 꾀를 홀딱 벗은 몸뚱이로 변하였다. 그들은 반쯤 미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쏟아내고 몸으로는 해괴한 동작을 반복하며 날뛰었다. 그러다 자리에 돌아와 한 사발씩 비우고 다시 합류하는데 그곳에는 그들뿐 아니라 박치수와 다금발이도 함께 있는 것 같았으며 다른 자리에서 만났던 사람과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까지 다 같이 덩실거리는 것 같았다. 달이 떠오르자 사위는 더욱 밝아졌는데 시커먼 놈 희멀건 놈 노리끼리한 몸뚱아리가 물커덩물커덩 덩실거렸고, 그때마다 샅 가운데 불거진 것들이 사정없이 흔들거렸다. 가을밤이 깊어가고 찬 이슬은 내리는데 장작불을 도는 무리는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어찌나 대가리를 흔드는지 형장에 끌려가는 놈처럼 산발이 된 자도 있었다.
어느 날 병호는 고부 진선마을의 일가붙이를 만나고 천태산을 우회하다가 풍치 좋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조는 듯한 천태산 자락 좌우로 구릉이 나지막하고 들판 가운데로 달천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 달천천에 다리 두 개가 놓였다 하여 옛적부터 그곳은 양간다리로 불렸다. 본래 살던 고창에서 나와 병호네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고부 두승산 서쪽 진선마을이요, 그 후 태인 황새마을과 지금실이며 소금실로 거처를 옮긴 것은 다 아들의 글공부를 위해 기창이 택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들른 양간다리 들판이야말로 새 삶을 원하던 병호에게는 딱 맞는 배필로 보였던 것이다. 마침 빈집이 있어 동리 주비(注比)에게 물었더니 들어오려거든 쌀 두 섬을 내라고 일렀다.
닷새 후에 병호네는 소금실을 떠나 양간다리를 찾아들었다. 병호가 수레를 끌고 아이 업은 숙영이 보따리를 이었으며 기창은 수레를 밀다가 평지에서는 손을 놓았다. 송진사를 만나고 돌아온 병호가 과거시험에 매이지 않겠다고 하자 기창은 약초를 거간하는 일 따위 하지 않을 터이니 집안을 건사하라고 일렀다. 그러마고 답한 병호는 사람 사는 곳에 이사하겠다는 뜻을 비쳤고 기창은 모아둔 것을 내밀며 찾아들자 하였다.
그들 네 식구의 행렬이 양간다리 빈집에 이르자 주비가 청년들과 나타나 짐 부리는 일을 도왔다. 병호가 이사를 간다고 하자 살림 안돈하는 데 쓰라며 필상이 쌀가마를 보내와 떡을 해서 이웃에게 돌리고 청년들은 따로 불러 탁주를 대접하였다. 주비가 푸성귀라도 갈아먹으려거든 소작 부칠 데를 알아주겠다 하여 숙영에게 물으니 농군 사는 곳에 왔으므로 상추 고추는 갈아먹겠다고 야무진 속내를 비쳤다. 집이 정리되자 병호는 경서 대신 기창이 뒤적이던 의서를 찾아 읽는데 도리어 기창은 의서를 물리고 경서를 가까이하더니 사람들과 교류하고 출타도 하면서 한가롭게 지냈다. 의서를 읽는 틈틈이 마을 청년과 술추렴도 하고 방담도 하면서 병호는 섞이려고 노력하였다.
“쌀을 보내시고 찾아주기까지…….”
그날도 의서를 읽는데 숙영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필상이 들어섰다. 병호가 버선발로 뛰어내렸다.
“날도 차워지는데 웬일이오?”
“허면 이사를 핑계로 절연할 생각인가?”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구려. 드십시다.”
“웬 의서인가?”
병호가 개다리소반을 한쪽에 물렸다.
“의술은 요긴하게 쓰이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과 섞이기도 쉽겠지요.”
“사람 사는 곳에 가겠다더니 농사를 할 생각은 아닌 게로군.”
병호가 필상의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곡괭이 자루 한번 안 잡아본 손입니다. 형님이나 희옥이나 밭에 나간다지만 농사일은 아니지요. 밭에 거름 내는 일이야 닥치면 하겠지만 오로지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사람 농사를 지으렵니다. 우리가 할 일 아니던가요?”
숙영이 안주거리와 탁주가 놓인 소반을 들여왔다. 한 잔 비운 필상이 도포자락을 들춰 무언가 꺼냈다.
“무엇입니까?”
“펴보게.”
필상이 내민 것은 손때 묻고 접힌 자리가 너덜너덜한 한지였다. 그것을 펴자 서툰 글씨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