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가 아니라 척양척왜입니다”

2024-12-01     이광재 작가

병호는 종정마을을 찾아 스승을 뵙고 필상의 집에 들를 예정이었다. 동래에서 돌아올 적에 동무들과 주기를 정해 만나기로 약조하였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송진사를 만나는 자리엔 송희옥이 동석해야 맞지만 따로 전할 말이 있으니 참례하지 말라고 언질해둔 터였다. 구절재를 내려와 벼이삭을 훑어 앞니로 껍질을 벗겨 내뱉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러 종정마을에 도착한 그가 큰절을 올릴 때까지 스승은 몸을 웅크린 채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유배를 갔다 온 송진사의 머리에는 서리가 앉고 수염도 희끗하였으며 눈 그늘이 짙었다.

“네 요즘은 무슨 글을 읽느냐?”

지난달에 부(賦)를 지어오라 하였으나 스승은 다른 것을 물었다.

“천성이 게을러 읽는 일은 못 하고 궁리만 하였습니다.”

“네가 한다는 궁리는 그렇다면 무엇이냐?”

“두서가 없는 일들이라 말씀드릴 것이 못 됩니다.”

나이 들어 헐거워진 콧날 때문에 내려앉은 돋보기 위로 스승이 눈을 치떴다.

“강화도를 침범한 왜구들이 수호조약을 맺자고 떠든다는 건 알고 있으렷다?”

얼마 전부터 이양선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었다. 북상하는 이양선에 조선 포대가 경고사격을 하자 강화도를 초토한 다음 영종도에 나타나 살육과 방화를 일삼았다는 것이었다. 그 배의 이름이 운양으로 수교를 제안하며 무력시위를 하자 백성들은 임진년이 떠오른다고 수군거렸고 개화파는 수교 쪽으로 가닥을 잡는 중이었다. 이때부터 송진사는 호서나 경기 일원의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다시금 회합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달려갈 것이다. 헌데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이때에 너는 구들을 깔고 궁리만 한단 말이냐? 너를 받아들여 몸소 선비의 길을 가르쳤거늘 경서를 의심하고 삿된 무리의 언설에 귀를 기울이더니 이제는 한다는 소리가 뭐? 궁리를 한다? 네 이놈! 대체 네가 하려는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송진사는 노기 띤 얼굴이었으나 끗발 좋은 패를 쥔 사람처럼 자신만만하였다.

“스승님께선 그리하실 것이나 제가 나선들 자리나 있겠나이까. 스승님께서 닦아 오신 선비의 길은 높고 멀지마는 저는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스승님께서는 광화문으로 가시고 저는 저대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저 왜구며 양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자들입니다. 저 또한 새로운 일을 모색할 것입니다.”

“그것은 답이 아니다. 그 새로운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스승의 독촉에 병호는 아직 어슴푸레한 갈피를 풀어헤쳤다.

“스승님께서는 위정척사의 길을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무엇인지요? 사악한 것을 쳐 없애자는(斥邪) 말은 바른 것을 지키자는(衛正) 뜻이므로 위정이 본체입니다. 헌데 그때의 정(正)이란 저 중원의 말과 글이며 습속을 일컬으니 그 밖의 것은 배척하자는 뜻이 아닙니까. 저희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자 하니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서야 어찌 참된 세상이 있겠나이까? 중원에 비록 향기로운 언행이 있으나 하고많은 꽃 중에 모란만 향기를 뿜진 않을 것입니다. 한때는 여진을 사악하다 하고 이제는 떠받들자 하니 위정이며 척사란 모였다 흩어지는 뜬구름 같은 것입니다. 너무 편협하여 으깨어지는 세상의 본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말입니다.”

병호를 바라보는 송진사의 눈이 한층 깊었다.

“네 이놈! 그러니 어쩌자는 것인지 말하라지 않느냐?”

“중원을 보지하자는 우물 안의 편벽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것은 세상을 지우자고 덤비는 저 새로운 무리들입니다. 이제는 척양(斥洋)을 말하고 왜가 그들과 한패이니 척왜(斥倭)를 외쳐야 합니다. 중원이 아니라 숨 쉬는 모든 생령이 정(正)이요,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위정척사가 아니라 척양척왜입니다.”

이곳에 드나든 지 십년인데 송진사의 눈에 병호는 무엇이었을까. 고집이 세고 주장을 세울 땐 주저하지 않지만 곤경을 면하고자 거짓을 고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학문의 길을 좇아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뿐 동몽을 모아 가르친 바 없는 송진사에게 병호는 유일한 제자였다. 그 제자가 대과에 들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마지막 쾌락이 완성될 것을 확신하였다. 세상이 얼어붙고 날새가 끊겨도 재를 넘어 큰절을 올리면 밭았던 물기가 출렁거려 몇 번을 킁킁거렸던가. 바람이 잦아들면 일렁이던 보리밭도 바로 서리라 믿었건만 이제는 다른 길로 가겠다 말하는 중이었다.

“네 이제 과거를 그만둘 작정이냐?”

병호가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저는 오늘의 등용 방식은 없어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일을 할 생각이니 스승님의 바람을 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반상과 같은 신분의 나눔을 없앨 것이요, 작금의 조세방식도 부숴버릴 것입니다. 남녀 간의 구별도 시세에 맞지 않는 것은 거부할 것이요, 양이들의 저 각자위심이 세상을 도륙하도록 두고 보진 않겠습니다. 그 준비를 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