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여 그런 일이 생기면 그리하시구려”
이양선이 다시금 쾅! 쾅! 쾅! 쾅! 쾅! 포를 발사하자 소나무가 휘청이면서 땅이 들썩이더니 포연이 밀려왔다. 왜국의 이양선 운양에서 쏘아대는 포성을 듣고 감만포 해변에 동래 부민이 쏟아져 나왔다. 곧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으로 좌현 우현에서 포를 발사하는데 다다다다다 연발총 소리까지 세상을 쪼갤 듯 울려 퍼졌다.
“저들은 조선 관원을 태우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 아닙니까?”
병호가 소리치자 필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네.”
감만포는 어느덧 동래 부민들로 하얗게 덮이고 신선대를 향해서도 주민이 밀려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함포사격은 계속되어 크고 작은 물기둥이 연이어 솟구쳤다. 뒤늦게 신선대에 오른 사람들은 발을 구르고 저주의 말을 퍼부었으나 돌이켜질 사태가 아니었다. 얼마간 더 포를 쏘더니 이양선은 뱃머리를 돌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주민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해 신선대에는 다시 네 사람만 남았다. 허공을 가린 연기가 흩어지며 하늘이 드러났다.
“조선은 이제 망하겠구나!”
희옥이가 악문 이빨 새로 말을 흘려보내자 병호도 낮게 으르렁댔다.
“어제의 해적은 뭍에 올라 노략질을 일삼더니 이제는 쪽지에 서명하라고 포를 쏘는구려.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따라 노략질을 일삼으니 더욱 간악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현혹돼 개화니 뭐니 하는데 우리도 약한 나라를 치자는 뜻 아닙니까? 더 높은 데로 가야지 어찌 저 각자위심을 배운단 말이오?”
“양이에게 망하기 전에 조선은 백성들 손에 먼저 망해야 해. 한바탕 크게 진작해야 다시 일어나지 않겠는가.”
기범이였고 필상이 내려가자는 듯 몸을 돌렸다.
“돌아가세나. 이필제가 다 뭔가.”
“그럽시다. 가서 뭐라도 합시다.”
그들은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신선대를 내려왔다. 누군가가 문득 중얼거렸다.
“서학인지 과학인지 원……. 쳐 죽일 것들!”
12. 백설만 펄펄 휘날려(을해, 1875)
소쩍새 소리가 처마에 치던 날 창호지에 달이 비쳐 젖을 물린 숙영의 모습이 또렷하였다. 방금 전까지 젖꼭지를 빨며 큰 숨을 쉬더니 어린것은 잠든 모양이었다. 백일을 넘어서자 아이는 방긋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쥐어주면 꼭 틀어쥐곤 해서 숨이 멎는 듯하였다. 아이의 입에서 젖꼭지를 뺀 숙영이 돌아눕다가 병호와 눈이 마주쳤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이에게 빼앗겨 서운하십니까?”
병호는 그녀 곁에 누웠다.
“그럴 리가요. 너무 뿌듯하여 겁이 나지요.”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숙영이 손을 들어 병호의 턱에 난 수염을 쓸었다. 먼 데서 부엉이가 울고 뒤안의 쥐는 부산스러운데 밤벌레 소리마저 요란해 밤이 낮보다 소란스러웠다.
“사람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산골은 답답하겠지요. 하지만 이는 아버님 뜻이 아닌가요?”
“동무들과 한 바퀴 돌면서 결심이 깊어졌습니다. 담을 쌓는 대신 사람들 속에 묻히기로요. 내일은 스승님께 뜻을 전하고 아버님께도 말씀드려야지요.”
귓불을 만지던 숙영의 손길이 멎었다. 저희끼리 싸움이 났는지 쥐들이 사나운 소리를 냈다.
“전 괜찮습니다. 일 년 넘게 몸 붙이고 살면서 서방님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봉상 아재를 포함해 동무님들이 뜻하는 바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거기까지 말을 잇더니 돌아누웠다.
“혹여 서방님께서 무슨 변고를 당하면 저는 돌아보지 않고 재가하겠습니다. 저 어린것을 어찌 먹이며 살겠습니까?”
그것은 뜻밖이면서 야속한 말이었다. 청상과부의 혼인은 옛적부터 금지되어 온 일이요, 어기면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알아 모두 경원시하였다. 양반이라도 재가녀의 자식은 문과시험을 볼 수 없었다. 병호네가 어렵사리 구해 숙독한 문건의 지은이도 그런 연고로 천하를 주유하며 깨달은 바를 글로 남겼지만 빌미가 되어 목이 잘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서운한 점은 닥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숙영이 그토록 험한 처신을 발설한 데에 있었다. 남자 품을 못 잊는다는 말이 아님을 알아들었고, 속을 감추는 사람이 아닌 것도 알지만 철렁 소리 나게 섭섭한 소리였다. 세상 살 결심이 분명치 않아 누구에게도 앞날을 말하지 못하는데 어찌 그런 일을 염두에 두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미리서 상대의 행로를 아는 것인가. 숙영의 말을 듣는 순간 막연하기만 했던 일들이 너무 생생해져 병호는 오한에 사로잡혔다.
“혹여 그런 일이 생기면 그리하시구려!”
그는 허위허위 쫓기며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꿈을 꾸다가 숙영이 몸을 흔들어 잠을 깼다. 동은 트지 않았지만 슬금슬금 피하는 숙영의 눈두덩이 발갛게 부은 것을 보았다. 고구마로 요기한 후 다녀오겠다 말하였지만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