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달라도 의연함만은 놀랍네그려”

2024-10-27     이광재 작가

서양 신부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병호의 이야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이쪽의 하느님은 우주의 순환원리와 하늘과 땅이며, 저 숲이나 강과 같은 것, 그것들이 생성되고 변화하며 순환하는 이치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그 속에 살아가는 한 부류에 불과하며 다른 무수한 것들과 세상을 나눠 쓰는 종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찌 생김새가 다르다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앞선 기물을 조금 덜 가졌다고 도륙하고 핍박하겠습니까? 하지만 서양의 하느님은 무엇이든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라서 인간의 생명이나 저 숲과 강도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단지 기물을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일까요? 조선의 식자들 중에는 개화라 칭하면서 서양의 기물에 현혹되어 무엇이든 옳다고 믿는다지만 우린 꼭 그런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약초꾼이 땅벌 집을 헐었는지 기름 둘러 볶은 오빠시 애벌레를 담아왔다. 희옥이네는 젓가락질이 분주하였지만 신부들은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전부리를 집어먹던 필상이 젓가락을 놓았다.

“불란서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까닭은 죄 없는 신부를 사형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그들은 응징이 아니라 수레에 조선의 재산을 바리바리 싣고 떠났습니다. 그 군사의 길안내를 맡은 게 서양 신부요, 조선인 신자였습니다. 성경이라 일컫는 책에는 주옥같은 말씀이 수록돼 복음이라 한다지요? 그런데 신부님과 서양 사람들은 그 책을 백성에게 나눠준 후 조선을 통째 빼앗을 속셈은 아닌가 묻고 싶습니다. 이 나라와 그 책을 바꾸자고 말입니다. 우린 그게 두렵습니다.”

리샤르 신부가 정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과학의 결과에 대해서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조국 프랑스에서 그를 신봉하는 이들이 혁명을 일으켰을 때 많은 신앙인들이 반대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니 아까 선비님이 말씀하신 우려와 상통하는 면도 있다 하겠지요. 우리는 복음을 조선과 바꾸자고 온 게 아닙니다. 그건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희옥이가 리샤르 신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말씀은 그리하시지만 실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신부님께선 어찌하시렵니까?”

희옥이와 눈을 마주친 리샤르 신부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저는…… 천국에 못 가겠지요.”

그러자 연초를 태우다 말고 기범이가 익살스레 말하였다.

“에구구,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천국에 가고 못 가는 일로 책임을 진다면 우리로선 답답한 노릇입니다.”

“천주께서는 인자하십니다. 천주께서는 사랑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 일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말이 끊어졌다. 길은 합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를 확인한 끝이라 필상이네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이것은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뼛속까지 채워진 관습과 믿음이며, 물러서면 삶의 근거가 허물어지고 마는 벼랑 끝 같은 것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에 마르땡꼬 신부가 입을 열었다.

“오늘 조선의 훌륭한 선비님들을 보았습니다.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이 나라를 비웃었습니다. 미개하다고 얕잡아보았지요. 하지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 신앙인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젊은 선비님을 보면서 이 말을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조선에 대해 품었던 제 오만한 생각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숙였다. 답례로 이편에서는 필상이 응대하였다.

“저희 이야기가 듣기 거북하기도 하였겠지요. 말을 하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모쪼록 반가운 사람들이 있는 고향에 속히 돌아가시길 빕니다만 조선에 계시는 동안이라도 무탈하십시오.”

필상과 동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신부들도 털고 일어섰다. 기범이네가 밖으로 나오자 약초꾼이 점심을 하고 가라고 청하였다. 하지만 해 안에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한다며 일행은 오항골을 빠져나왔다.

괴목동천을 건널 무렵 필상이 말하였다.

“생각은 달라도 의연함만은 놀랍네그려. 죽음도 초탈해버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면서도 두렵구먼.”

필상의 말에 기범이가 피식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 나라에서나 믿으라면 되지 궁상맞게 저게 뭡니까? 꿍꿍이가 있단 말이우. 저들은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저들도 속구 있는 겁니다.”

봉우리 하나를 돌아서 병호가 탄식하였다.

“그나저나 과학이라는 더 무서운 괴물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이러다 그것이 또 다른 서학이 되어 세상을 억압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양선까지 넘어설 세상을 만들자고 했던 게라구.”

“그를 다시개벽이라 하지 않았나?”

“글을 쓴 선비도 다시개벽이란 말만 하지 뭔지 말하지 못하는데 어찌 알고 만드는가.”

“남녀 교접을 누가 써놓아서 아는가? 까짓것, 우리가 쓰지.”

그들은 갑자기 헤퍼져서 수다를 떨면서 남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