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를 막아라’, 미국에 의한 농지개혁

2024-10-20     강광석 위원장
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군정, 일제 방식으로 농지 빼앗아 조선인민 착취

1945년 9월 8일, 미군은 서울에 입성합니다. 8월 15일에 조선이 해방됐으니 3주 만에 일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일제 통치하의 조선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일본을 이겼으니 일본의 땅인 조선도 역시 미국의 땅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인을 쫓아내고 만든 용산 일본기지가 용산 미군기지가 됐습니다.

하지중장이 이끈 보병사단 약 7만2000명이 인천에 먼저 상륙했습니다. 그때 조선인민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서울 종로거리에 환영인파가 갑자기 몰렸는데 행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미군은 조선인민 몇을 총으로 쏘았습니다. 미군의 인천 상륙 하루 전, 9월 7일 맥아더 장군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체 권한은 당분간 본인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나 질서를 교란하는 자는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한다’라고도 밝혔습니다. 맥아더는 지금은 인천에 동상으로 서 있는데 그곳은 많은 반미주의자들의 투쟁의 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38도선 위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는데 그들은 나갔고 그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는데 그들은 약 4만명 넘게 지금도 머물러 있습니다. 이승만정권이 들어선 1948년 8월 15일까지 미군정은 3년 동안 지속됩니다. 당시 미군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인민위원회를 불법단체로 규정했습니다. 미군정은 일제하 통치기구와 친일파 행정관리들, 지주들, 영어를 잘하는 지식인과 통역사를 앞장세워 통치했습니다.

김구는 해방이 되자 1945년 11월에 미군 비행기를 타고 입국했고 이승만은 10월에 입국했습니다. 김구는 1949년 6월에 암살당했고 이승만은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됐는데 1960년에 국민에 의해 축출됩니다. 김구와 이승만은 둘 다 공산당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공산당이나 주장하는 농지개혁’을 반대합니다. 김구가 만든 한독당은 뒤늦게 농지개혁을 마지못해 찬성했고 이승만도 미국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농지개혁에 동의합니다.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처음부터 주도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는 미군정이 추진한 일본인 적산농지 불하를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1945년 10월 5일, 그러니까 서울에 입성한 지 한 달 뒤에 미군정은 법령 제9호, ‘최고소작료 결정의 건’을 공포합니다. ‘첫째, 소작료는 해당 전지의 수확물 총액의 3분의 1을 넘지 못한다. 둘째, 소작료 유효기간에는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권을 해제할 수 없다. 셋째, 이를 위반한 계약은 소정의 최고 소작료에서 1할을 감하고 납부한다.’

1945년 당시 조선은 소작농이 전체 농민의 86%였고 전체 농지의 68%가 소작지였습니다. 소작료는 악질 지주 경작지의 경우 80%에 달했습니다. 미군정의 ‘최고소작료 결정의 건’은 그 선한 뜻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는데 미군정은 조선인민의 생활상의 고충은 안중에도 없고 단지 중앙청에 걸린 미국 국기를 지키는 데 급급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이었습니다. 미국은 동양척식회사의 농지를 빼앗아 총독부가 했던 방식 그대로 조선인민을 착취했습니다.

1945년 당시 조선은 소작농이 전체 농민의 86%였고 전체 농지의 68%가 소작지였다. 소작료는 악질 지주 경작지의 경우 80%에 달했다. 미군정은 동양척식회사의 농지를 빼앗아 총독부가 했던 방식 그대로 조선인민을 착취했다. 사진은 지난달 3일 전북 부안군 계화면 들녘의 추수 풍경. 한승호 기자

북한 토지개혁, 경작권 인정한 조선시대 도지권과 비슷

북한은 1946년 3월에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포합니다. 북한 정권이 단행한 토지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농민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인정한 것입니다. 소유상한선은 5ha입니다. 5ha이상 소유한 지주의 농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지, 일본인 지주의 농지, 민족 반역자의 농지, 지주의 소작지를 무상몰수해서 소작농과 토지 없는 농민, 토지가 적은 농민에게 차례로 무상분배했습니다. 1947년에는 ‘산림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하여 모든 산림을 국유화합니다.

분배된 농지는 매매와 양도를 금지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의 경작권만을 인정한 것이니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도지권과도 비슷한 성격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도지권은 매매나 양도가 가능했는데 북한의 경작권은 매매되거나 양도할 수 없어서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땅을 갖게 된 농민은 박장대소했고 살만했습니다.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은 북한 농민의 가장 가려운 곳을 긁었고 그 소문은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북한 토지개혁의 전개 과정에서 아래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정책의 생명력과 지속성이 무엇으로 담보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김성보는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북한의 토지개혁 논의는 1946년 2월 말에 개최된 ‘북조선농민대표대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농민들은 모든 소작지를 지주에게서 무상몰수한 다음, 소유권 자체를 농민에게 부여하는 방안을 채택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제출하였다.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농민대표대회’의 결의를 존중해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 법령을 통과시켰다.’

북한은 1946년 3월 5일에 토지개혁법을 공포하는데 그 논의는 이미 1945년 해방직후부터 바로 시작됐습니다. 북조선농민대표대회를 통해 현장 농민의 안을 먼저 확정하고 그것을 임시인민위원회에 제출해서 결정합니다.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북한의 토지개혁 초안이 준비돼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1936년 만주에서 활동한, 북한 정권을 세운 무장투쟁조직과 연계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중 제4항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일본 국가 및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이 조항이 향후 10년 뒤에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완성됐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북한 정권은 토지개혁을 그야말로 속도전 방식으로 관철하는데 법을 공표하고 약 3주 만에 끝내 버립니다. 이때 분배한 토지의 면적은 북한 전체 경지의 53%에 해당되는 94만6000정보로, 당시 전체 소작지의 90%에 해당되는 규모였고, 전체 농가의 70%가 토지를 분배받았습니다. 토지개혁의 기초자료가 된 것은 일제가 실시했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아프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역사적 사실이며 남한의 농지개혁도 이 자료에 의해 추진됩니다.

미군정, 갑자기 귀속농지를 불하하다

맥아더 사령부의 통제하에 있던 일본도 1946년 9월 ‘자작농창설특별조치법’ 및 ‘농지조정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은 일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소작농을 없애고 자작농을 육성할 목적으로 맥아더 사령부가 1945년 12월에 내린 ‘농민해방에 관한 명령'에 기초한 것입니다. ‘농민해방에 관한 명령’의 주요 내용은 지주제의 철폐, 농지증권의 발행, 농지위원회를 설치해 주요 농지개혁 관련 업무를 관장토록 한다는 점 등으로 돼 있는데 이는 남한의 농지개혁과 매우 흡사한 방식입니다.

1946년 3월 5일에 북한에서 북조선토지개혁법이 공표되자 미국 외무성에서 파견된 키니(keney)는 3월 8일 자작농을 육성하여 구일본인(지주) 소유지를 불하하겠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3월 15일 미군정은 그 계획을 전격 발표합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미군정이 일본 농지개혁을 추진할 동력으로 작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승옥은 ‘이승만의 농지개혁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에서 아래와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남한을 통제하던 미군정은 초기에는 농지개혁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 이유는 농지개혁이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사적소유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적 색깔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농지개혁에 대해 미온적이었던 미군정이 갑자기 귀속농지를 불하한 이유는 이러한 북한의 토지개혁과 맥아더사령부에 의해 추진된 일본의 농지개혁의 영향 때문이었다.’

국가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농지개혁

남한도 1949년에 농지개혁을 단행합니다. 북한보다 3년이 늦었는데 남한 내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은 진보적 개혁을 바라는 농민의 요구와 공산주의를 막아야 하는 미군정의 목표와 지주와 미군정의 눈치를 동시에 봐야 하는 이승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그 사이 지주들은 자신의 땅을 차명으로 돌렸고 문중에 기증했으며 자식들에게 양도하고 교육사업에 투자했습니다. 남한의 농지개혁의 기본구조는 미군정이 일본에서 실시했던 1946년 농지개혁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면적 제한을 3ha로 하고 소작지를 모두 유상몰수하여 농민에게는 유상분배했습니다. 전체 농지의 25%만 분배됐는데 지주들이 이미 사전에 다 방매하여 적용대상 면적이 북한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53년 1월, 대만의 국민당 정부도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농지개혁을 단행합니다. 1단계로 소작료를 남한의 미군정이 공표한 ‘소작료 결정의 건’ 방식대로 33%로 제한하고, 2단계로 역시 남한에서 일제 적산농지를 불하했듯이 국가소유 공유지를 소작인에게 매각합니다. 그리고 3단계로 지주의 소유농지가 3ha를 넘지 못하도록 하고 나머지 토지는 국가에서 유상몰수하여 소작농에게 재분배했습니다. 경지의 지가는 주요 농작물의 전년 수확량의 2.5배로 책정됐고 상환 방법은 채권 지급 방식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토지개혁에 몰두했고 일본과 남한과 대만은 그들 국가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농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일본과 대만, 남한은 농지를 재분배함으로서 지주들에게 잉여자금을 안겨 금융산업을 맛보게 했고 자작농에게는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사회재분배는 제조업 활성화로 수출과 내수시장을 동시에 촉진시켰습니다. 북한과 중국은 토지개혁 성공의 바탕 위에 현재의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했고 일본과 남한과 대만은 농지개혁으로 작금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뤄냈습니다.

농지개혁은 시대와 세력이 맞서 응전하는 격변기에 일어나며 개혁을 바라는 대중의 압도적 지향을 토대로 사회적 추진력을 획득합니다. 38선을 넘어온 소문은 남한 민중을 들끓게 했고 대륙을 휩쓴 마오의 토지개혁이 바다 건너 대만의 개혁을 추동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식의 토지개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했고 우리는 우리식의 농지개혁으로 자본주의의 총아가 됐습니다.

우리 사회의 농지문제는 1945년경만큼 심각한가? ‘경자유전에 입각한 자작농주의’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가? 다음 편에서는 한국사회 농지문제의 현실에 대해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