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농민 억압할수록, ‘퇴진운동’ 불씨 더 크게 타오를 것”
[인터뷰] 김재영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 사무국장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SS기’를 아십니까
누구나 알법한 농기계인 트랙터, 하다못해 이앙기도 아닌, 이름조차 생소한 ‘SS기’가 그날 여의도에 향한 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농촌에서 SS(스피드 스프레이어)기는 주로 과수농업에서 사용하는 방제용 소형 승용 농기계를 일컫는다. 경남의 농민들은 과수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에야 같은 농민들도 생김새를 잘 모르는 이 농기계의 ‘비주류성’을 역으로 이용해 감시망을 통과해보기로 한 것이다.
“(경남 농민들도) 본래는 트랙터를 요구했는데 여기서 서울까지 거리가 있다 보니 그걸 실어 나를 큰 차(2.5톤 트럭)를 구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나온 게 ‘차라리 SS기를 들고 가 보자’는 이야기였죠. 이 기계는 거창에서 준비했는데, 실제로 트럭에 실어보니까 진짜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왔어요.”
실제로 그날 다른 지역에서 준비했던 농기계들은 전부 한강 다리를 넘기 전에 제지당했고, 이 조그만 농기계를 실은 1톤 트럭만이 아무 탈 없이 여의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결국 뒤늦게 눈치 챈 경찰이 대회장에 진입하려던 트럭을 막아 세우면서 그날의 사건이 벌어졌는데, ‘차에 얌전히 앉아있었던’ 그가 구속까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자기들 계획상 여의도 진입 전에 다 막았어야 했는데 한 대가 결국 들어 와버려선지, 상당히 강경하게 대응을 한 것 같아요. 몰려든 경찰에 트럭이 한 번 멈추고 나서 농민들이 어떻게든 트럭을 더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줬는데, 그때 살짝 트럭을 더 움직였던 게 결국 특수공무집행방해가 된 거죠. 유치장에 있었을 때만 해도 당연히 구속은 안 될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영장실질심사 자료를 보고 검사, 판사를 마주하니 이제 느낌이 오더라고요. ‘아, 무조건 나를 잡아넣으려고 준비를 했구나.’’’
7월 4일 그날의 의미
김씨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수입농산물로 인해 농민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느냐’는 식의 판사의 물음에 열심히 농민들의 입장을 전달했지만, 정작 돌아오는 반응은 ‘그렇게 했어야만 했느냐’는 반문뿐이었다는 기억을 꺼내놓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서울에 올라가고, 농기계를 내려놓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날(7월 4일) 앞뒤로 비가 자주 왔어요. 과수 농사는 적기 방제가 참 중요한데 모처럼 맑았던 그날 약을 쳐야 하는 기계를 갖고 올라간 그 마음은 그야말로 ‘절박함’이죠. 그 농민대회는 지금 이 정부의 농업정책이 곧 ‘농업 말살’이고 ‘농민 파괴’이기에 이걸 끝내기 위해선 지금부터의 투쟁이 정말 중요하다, 지금 이 정권이 끝나지 않고는 절대 풀리지 않을 문제다라고 선포하는 대회였는데, 정부도 그걸 잘 알았던 게 아닐까요.”
그는 농민이기 이전에 갓 서른일곱의 청년이기도 하다. 3년의 영농정착 기간을 버티다 빚만 안고 농촌을 떠나거나 농사를 지어도 농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청년농민들을 숱하게 마주하는 그는, 농업·농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우선하지 않고선 청년농 육성정책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농민들의 주장에 당위성을 더했다.
“저는 1차적으로 농업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돼 기성 농민들의 삶이 평탄해지고, 괜찮아져야 젊은 세대가 들어와서도 여기에 이제 어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상황을 보면 농촌에 적이 없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뿌리를 내리기엔 정말 너무 어렵거든요. 지금은 ‘개인’만 보고 그냥 하우스를 크게 지어주면 되지, 돈을 지원해 주면 되지 이런 방식인데 어떻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변한 건 없다…소중한 사람들 위한 삶 계속”
그는 정부가 절박한 농민들을 계속 억압할수록 농민운동·퇴진운동의 불꽃은 더욱 크게 타오를 것이 분명하다며, 당시 벌어진 구속과 유죄 판결 역시 큰 실수가 될 것이라 조심스레 예상했다. 오늘처럼 인터뷰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긴 것 이외에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는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농사와 농민운동에 매진하는 청년농민의 삶을 계속 이어나가리라는 다짐을 끝으로 덤덤하게 회상을 마쳤다.
“3일 만에 1만3000명이 탄원에 참여했다는 얘기에 정말 놀랐고요, 구치소로 옮겨가고선 접견·편지·영치금이 끊임없이 들어오는데 같이 있던 구치소 사람들이 그걸 보고 존중을 표할 정도였어요. 한꺼번에 들어온 70통의 편지는 마치 꽃다발을 받는 느낌이었는데, 원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겐 소중한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믿는 삶을 위해 해오던 대로, 좀 더 열심히 살아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