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농민들 심정이 꼭 저렇다. 가슴에 멍이 심하게 든 것처럼…”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정녕 황금빛으로 물들었어야 할 들녘이었다. 네모반듯하게 경지정리된 논엔 풍년농사를 가늠케 할 정도로 고개 숙인 벼들로 넘실거려야 했다. 그러나 멸구가 창궐했다. 이상기후로 초가을까지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연일 이어졌고 멸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추수를 앞둔 논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멸구가 영양분을 갉아먹기 시작한 벼는 하얗게 마르며 쓰러졌다. 영글지 못하고 영양분이 빠진 낟알은 쭉정이처럼 푸석거렸다.
꼭 멍이 든 것처럼 논 곳곳에 크기도 제각각인 웅덩이가 생겼다. 한 필지 논 전체가 멸구로 인해 하얗게 말라버린 논도 눈에 띄었다. 앞의 논을 초토화시킨 멸구는 그 옆 논으로 옮겨갔다. 멸구의 확산은 순식간이었다. 추석 연휴를 앞둔 농민들은 명절도 반납한 채 긴급하게 방제를 시작했지만 창궐한 멸구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전남 고흥·해남·장흥, 전북 순창·임실 등을 비롯해 한반도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벼멸구 피해 면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지난 2일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가차리 들녘을 찾았다. 이곳에서 1만여 평 규모로 벼농사를 짓고 있는 박용웅(80)씨가 ‘메루 먹은’ 논에서 추수를 하고 있었다. 멸구 피해를 줄여보고자 논을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채 수확에 나선 길이었다. 진흙이 질척이는 논에서 콤바인이 쓰러진 볏단을 자르지 못하고 뿌리째 뽑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기계를 자주 세우고 손으로 볏단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추수가 된다 한들 멸구로 푸석해진 벼로 인해 콤바인 뒤로는 하얗게 먼지가 일었다.
박씨는 “반백 년 이상 농사지었지만 (멸구로 인한) 이런 피해는 난생처음”이라며 황망해 했다. 올해 첫 추수라 수확량이 얼마가 될지 가늠조차 못 했다. 앞서 정부가 피해 벼 전량을 매입하겠다고 대책을 내놨지만 구체적인 가격, 시기도 명시하지 않아 농민들로선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했다. 박씨는 “이 상태에서 태풍이나 비바람이 몰아쳐 (벼가) 쓰러지는 날엔 논을 불사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미 피해가 막심한 논에 기계를 넣어본들 전혀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날 추수 현장을 찾은 땅끝농협 관계자는 송지면 관내 경지면적에서만 최소 25%가량 피해를 예상 중이라고 밝혔지만 박씨는 자신이 경작한 논 중 “50% 이상이 ‘메루 먹었다’”며 피해가 더 심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가차리 들녘 위로 드론을 띄웠다. 하늘에서 본 피해 상황은 말 그대로 처참하고 절망적이었다. 전남 곡성의 한 농민은 멸구 피해를 입은 들녘 사진을 보며 “현재 농민들 심정이 꼭 저렇다. 가슴에 멍이 심하게 든 것처럼…”이라며 말을 아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자세히 봐주시기를 바란다. 추수를 앞둔 황금들녘에 심하게 멍이 생겼다. 올 한 해 이상기후의 고된 여건 속에서도 농민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정부는 이를 ‘자연재해’로 인정하기를 지금까지도(3일 현재) 주저하고 있다. 정부의 그 우유부단한 태도가 역대 최악의 멸구 피해를 입은 농민들 가슴에 더 깊고 진한 멍을 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