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멸구 피해 농민들 "값도 없이 사주겠다고만...기후재난 대책 맞나"
농민의길·민중행동, 30일 대통령실 앞서 '병충해·수해 특별대책' 촉구 "농민·공무원 함께 추석 반납하고 벼멸구 방제...사람은 할만큼 했다" 자연재해 인정·특별재난지역 선포·적정가 매입 등 특별대책 수립 요구 1999년 해남 '목도열병', 2014년 영암 '이삭도열병' 등에 지원 사례도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전남·전북에서 시작된 논 벼멸구 피해가 계속해서 확산 중인 가운데, 정부가 대책으로 여전히 피해 벼의 ‘매입’ 의사만 밝혀두고 있는 데 대해 분노한 농민들이 상경했다. 벼를 들고 대통령실 앞에 선 농민들은 정부가 명백한 기후재난의 결과를 보고도 무책임한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민과함께하는농민의길(상임대표 하원오, 농민의길)과 전국민중행동은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병충해·수해 특별대책 촉구대회’를 열고, 벼멸구 창궐로 인한 피해의 자연재해 인정 및 특별재난지역 선포, 적정가 매입 등의 조치를 신속히 발표해 농촌을 보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원오 농민의길 상임대표는 “쌀값 폭락에 벼멸구, 물폭탄까지 그야말로 설상가상,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인 농촌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특히 벼멸구 피해는 지금도 확산되고 있어 조치가 시급하나 정부가 선심 쓰듯 내놓은 대책은 피해 벼 수매 뿐”이라며 “피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어디까지 커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확산을 어떻게 막을지 대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덮어놓고 그냥 사주겠다고만 하고 있다. 한 해 농사를 고스란히 날릴 위기에 놓인 농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대책”이라고 비판했다.
벼멸구 피해가 극심한 전남에서는 절규에 가까운 호소가 나왔다. 윤일권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의장은 “벼멸구가 극성이고, 혹명나방도 극성이고, 때문에 농약줄 끌어가며 두 번 세 번 약을 더 쳤다. 사람이 할 만큼 했는데 (피해가 났으니) 이게 자연재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며 “기후위기는 전 세계적인 상황이고 돈만 주면 아무 때나 수입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하루빨리 현실을 직시해 긴급재해를 인정하고 농민들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말했다.
농민들과 함께 이 자리에 상경한 박형대 전라남도 의원(전남 장흥)은 “전라남도에서는 농민들, 지방공무원들, 농약방, 모든 사람들이 추석을 반납하고 벼멸구 방지에 나섰지만 확산을 막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윤석열 대통령과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며 “장관은 이미 확산할 대로 확산되고, 피해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황에야 이제 피해 현장을 돌아본다고 하는데 지금은 가을 소풍을 떠날 때가 아니라 대통령과 함께 긴급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호소했다.
정홍균 전국쌀생산자협회 사무총장(전남 곡성) 또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어떤 정책을 실시한들 농촌의 위기, 지역의 위기, 인구 위기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며 “일정 규모 이상의 재해가 발생하면 보험 처리가 아니라 당연히 국가의 재정을 투입해 지속가능한 농촌사회가 될 수 있도록 정치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한편 올해 충남 부여군에서의 농활 경험을 토대로 지지발언에 나선 대학생 김지홍씨는 “이 기후재난의 시대에 폭염과 수해로 이중고를 겪는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책임지고 대책을 내지는 못할지언정 자연재해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 것은 농민 문제를 방임하고, 포기하고 농민 개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한다”라며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정부가 과연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유달리 농민들에게만 이렇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소감을 전했다.
마찬가지로 농민들을 지지하기 위해 함께 선 전종덕 진보당 국회의원은 “언발에 오줌누기식 땜질 대책으로는 기후재난과 농업재해를 막을 수 없다”라며 “농민들이 직접 만든 양곡관리법의 국회 통과, 벼멸구 피해의 농업재해 인정, 수해 특별대책, 그리고 농민 생존권 보장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약속했다.
한편 현재 정부는 기상을 이유로 발생한 병충해의 자연재해 인정을 고사하고 있지만 선례가 없지는 않다. 농림부는 전남 해남에서 지난 1999년 대거 발생했던 ‘목도열병’ 피해에 대해 시기 상 절차의 문제로 자연재해로 처리하지는 못했으나, 그에 준하는 보상지원을 한 바 있다. 또한 지난 2014년 나주·영암 등 전남 등지에서 창궐한 ‘벼 이삭도열병’ 역시 농어업재해대책심의위원회에서 기상여건으로 인한 농업재해로 인정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수확기가 다 지나고서야 조사가 시작된 탓에 정밀한 피해조사 및 그에 따른 지원이 이뤄지지 못했던 점이 크게 비판 받았던 만큼, 농가소득과 농촌경제의 보전을 위해 ‘수확기 전’ 자연재해 인정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양옥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은 “‘벼멸구 피해 있으니까 우리가 사 드릴게, 얼마로 사들일지는 몰라(잠정등외)’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책이 아닌, 기후재난이 우리를 덮쳤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기후위기 시대에 자연재해란 어디까지인지, 이는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지, 쌀 가격은 어떻게 잡을 건지를 다룰 대책이 필요하다”라며 “식량을 돈으로 살 수 없는 위기가 왔다. 좀 제대로 된 정신으로 농민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기 바란다”라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