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진지해졌는지 모르겠구려”

2024-09-29     이광재 작가

소금실로 옮겨간 병호는 꼼짝없이 박혀 지냈는데 『영언여작』이며 필사한 문건을 소처럼 새김질하더니 어느 날은 모조리 불태우고 불러오는 숙영의 배를 쓰다듬는 재미로 살았다. 그런 그들이 작정하고 모인 건 서양 신부와 만날 기회가 생긴 탓이었다. 서양 신부 두 사람이 미사를 주관하고 세례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진산 약초꾼의 전갈에 병호가 서둘러 연통했던 것이다. 이들은 희옥이의 처가 차려낸 술상을 두고 근황을 확인한 뒤 갑자기 데면데면해져 지루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매일같이 몰려다닐 적에는 말들이 샘솟았지만 만남이 뜸해지자 이야기 한바탕이 끝나면 입들이 무거워졌다. 견디지 못한 기범이가 잔을 탁 내려놓으며,

“이거 뭐 사돈댁처럼 어색하구려. 늙는 게유?”

하는데 사람들이 조용히 웃었다.

“기범이 아우와 병호 아우는 자식도 못 봤는데 늙으면 쓰나?”

“그런데 이 분위기가 뭐냔 말요?”

“그럼 공동으로 할 얘기를 하나 꺼내보시게.”

“제기럴, 언제나 그건 내 몫이구려.”

기범이는 남은 잔을 비웠다.

“서양 신부를 만나는 길이니『영언여작』이야기나 해봅시다. 식물에겐 생혼이 있고 짐승에게는 각혼이 있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말은『천주실의』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생혼과 각혼은 식물과 동물의 몸체에서 생겨 몸이 사라지면 사라지지만 사람에게 머무는 영혼은 천주가 창조한 것이므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였지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명오의 작용을 좀 더 논하였고, 리기 논쟁과 비슷했습니다. 그간 리가 우선이냐, 기가 우선이냐, 함께 가느냐 떠들었는데 그러고도 답을 얻지 못한 유자들이 명오며 생혼 각혼 관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잖소. 정다산도 그랬답디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언제나 천주로 귀착되니 무위이화와는 반대였습니다.”

희옥이가 안주를 우물거리며 기범이의 말을 받았다.

“책을 읽을 제는 모르겠더니 기범이가 설명을 하니 뚝딱 이해가 되네그려. 말도 어렵고 이야기를 끄는 방식도 이쪽과 달라 나는 영 읽기가 사납더구먼. 게다가 모든 논의가 천주로 귀착되니 이제는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마감될지 짐작이 돼버립디다. 그보다도 지난번 필상 성님이 단양에서 얻어온 문건에 관해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경주 선비가 썼다는 문건 가운데 그 불연기연(不然基然) 말입니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고, 모른다 싶으면 또 알 것 같더란 말이오.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과 그것이 그렇다는 것인데 작것, 누가 말 좀 해주시구려.”

“그 글은 쉬우면서도 어려웠지.”

필상이 맞장구를 치자 기범이가 설명하였다.

“그것이 그렇다는 기연은 경험이나 감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잖소.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들이란 것도 물론 알지요. 그러니 이건 기연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거슬러 가면 도통 모르게 된단 말입니다. 불연이지요. 서학에서는 불연의 자리에 천주를 두지 않습니까? 하지만 천주를 운위할 게 아니라 불연도 기연을 통해 상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연으로부터 헤아려 근본을 탐구할 수 있으니 만물이 만물되고 근본이 근본되는 이치를 어찌 불가하다 하겠는가(於是 而揣其末 究其本 則物爲物 理爲理之大業 幾遠矣哉) 하는 구절이 그것이지요.”

“훈장님이라 그런가 기범이의 설명은 어찌 이리 쏙쏙 박히는지 모르겠네.”

희옥이는 농을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헌데 난 이런 뜻도 있는 거 같더란 말이우. 기연은 우리가 겪어 아는 것이니 그렇다 치고 불연은 지식의 한계로 알 수 없는 것들이니 바득바득 알겠다고 끙끙대지 말고, 천주가 만들었느니 어쨌느니 그런 헛소리도 하지 말자고 말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척하다 보면 혹세무민하게 되니 허황하고 허황하다, 그렇게 말입니다.”

필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다고 보네.”

“이봐, 병호. 자넨 왜 꿀 먹은 벙어리여? 요새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나?”

아까부터 웃기만 하는 병호에게 희옥이가 퉁바리를 하였다. 병호가 술잔을 들다 말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진지해졌는지 모르겠구려. 이러다 어느 순간 나라 엎을 생각으로 넘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

자리가 어색해지자 기범이가 손을 휘저었다.

“사내 넷이 모였는데 나라 엎을 궁린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우선은 자네 의견이나 말해보란 말일세.”

병호가 다시 웃었다. 그새 코밑수염이 짙어지고 턱에 난 수염도 가시처럼 굵었다.

“난 동무님들 의견이 다 맞는 것 같소. 그런데 경주 선비의 글 중에 언문으로 쓴 것은 그 취지가 놀라웠소. 이쪽이든 저쪽이든 마땅찮은 구석이 있으면 우리 손으로 해결하자는 뚝심 말이외다. 그래 언문을 쓰지 않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