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㊷] 도깨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진주의 새벽시장

2024-09-29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오전 7시의 진주새벽시장 전경. 류관희 작가

 

 

시장의 꽃은 물건을 팔러 나오는 상인과 물건을 사러 나오는 소비자, 그리고 상인이 들고 나온 물건이 다다. 음식을 하는 사람으로 오일장이나 전통시장을 다녀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이러다 오일장과 전통시장이 곧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다. 오일장이나 시장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물건을 살 장소가 없어 먹고 사는데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대형마트나 온라인 마켓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오일장을 다니고 전통시장을 다니다 보면 단순히 다니는 재미를 넘어서는 우리의 농수산업과 유통 등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수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새벽에 출발해 간 진주의 새벽시장 풍경은 아름답고, 풍요롭고 따뜻했다. ‘더도 덜도 말고 진주 새벽시장 같기만 하여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였다.

이른 아침 6시, 시장은 벌써 자리를 잡고 물건 진열을 거의 끝낸 상인들의 에너지로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우리는 시장 돌아보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아침 6시부터 9시까지만 팔고 있는 국밥을 먹으러 그야말로 ‘백년가게’인 천황식당으로 갔다. 육회비빔밥과 석쇠불고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새벽시장이 열리는 시간에 아침도 못 먹고 나왔을 상인들이나 손님들을 위해 5000원짜리 국밥을 판매하는, 사회 공헌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식당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아직도 물이 고여 있는 130년 된 우물과 직접 담가 사용하는 젓갈과 장을 위한 장독대가 인상적인 곳이기도 하다. 음식 맛도 괜찮다. 가게 입구엔 자동차회사에서도 구매의사를 보일 만큼 오래된 자동차가 한 대 서 있다. 지금도 매일 남은 음식을 돼지사육장으로 보내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니 참 대단하다. 심지어 티끌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관리가 잘 된 모습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장보기가 끝나 오토바이에 짐을 싣는 어느 식당의 주인아저씨. 류관희 작가

 

바가지만 만들지 않아요, 나물이나 국으로 맛있게 해먹어요.류관희 작가

 

 

식당에 면한 골목으로 진입하면 바로 새벽시장이다. 아직 7시도 되기 전이지만 추석이 코밑이라 그런지 이미 시장은 사람들과 어깨가 닿을까 걱정해야 할 만큼 붐빈다. 벌써 장보기가 끝나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나만 빼고 다 부지런한 세상이 굴러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시장 돌아보기를 시작한다. 방아를 많이 먹는 동네인 만큼 거의 모든 좌판에 꽃대를 같이 엮은 방앗닢들이 있다. 개량방아는 잎이 크고 깨끗하지만 참방아는 잎이 작은 대신 우리가 아는 방아의 향 말고도 깊은 단맛이 매력적인 향신료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 단 산다. 아직 꽃이 한창인 메밀의 어린 순을 뜯어 나온 상인도 있다. 또 장바구니에 담는다.

명절 김치를 담글 홍천 운두령의 배추와 무도 와 있다. 울퉁불퉁한 가지각색의 호박들, 늦은 참외, 이른 사과와 감, 흙도 마르지 않은 고구마도 있다. 쳐다만 봐도 침이 고이는 귤, 데쳐서 시금치 대신 무쳐 차례상에 올릴 어린 열무도 나왔다. 빼놓을 수 없는 게 박이다. 한 덩이 사다가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내고 껍질을 벗겨 나물도 볶고 국도 끓이면 좋겠다. 그렇게 먹고도 남으면 잘 켜서 말렸다가 겨울에 묵나물로 먹어도 좋은데…, 하면서 지나간다.

 

 

카드는 없어요, 현금이 오가는 새벽시장의 전경. 류관희 작가

 

이른 시간의 지친 몸을 각성시키는 음료들도 여기저기서 팔리고 있어요. 류관희 작가

 

 

이맘 때 시장엔 풋밤도 나오고 풋대추도 나온다. 풋밤은 사다가 까서 밥에 놔먹으면 아이들 얼굴에 살이 오른다. 우리나라에서 사과대추 재배가 시작된 뒤 말리지 않은 풋대추가 시장에서 당당하게 과일로 팔리기 시작했는데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도가 장난이 아니라 자리를 잡은 것 같다. 햇땅콩도 좋아한다. 볶은 땅콩은 먹다보면 땅콩의 기름진 맛이 느끼하기도 하고 목이 메는데 수확하고 말리기 전의 풋땅콩은 그렇지 않아 좋은 것이다. 한 망 사다가 삶아서 까먹으면 멈출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들게 되니 조심해야 한다. 까먹다 남으면 간장과 조청을 넣고 조린다. 밥 반찬으로 제법 요긴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장바구니가 무거워진다. 골목을 돌면 마른 햇고추가 보이고, 다시 골목을 바꾸면 날이 가물어 야물어진 매운 고추와 고추지가 함께 있는 시장이 이어진다. 토란을 비롯해 우엉, 마, 더덕, 도라지 같은 뿌리채소도 한 자리 잡고 있다. 가을엔 뿌리채소가 나의 힘이 된다.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아본다.

돌다가 든 생각,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좋겠다. 출근하는 길에 장을 봐서 매일매일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속을 채워줄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그림도 시장 안에 있다. 사람들과 함께 장을 보고 부엌으로 돌아가 같이 음식을 해서 나눠 먹거나, 매일 신선한 재료들로 밥상을 차려 파는 시장 안에 식당을 운영하는 그림이다. 어쩌면 이 그림도 새벽에 잠시 섰다가 9시가 되면 사라지는 도깨비시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내일도 여전히 새벽장은 다시 설 것이다.

 

 

한 그릇 사다가 밥만 하면 영양도 맛도 한 가득 담아 먹을 국 3총사. 소머리국, 소고기무국, 장어국. 류관희 작가
경상도의 최애 향신료, 방아. 류관희 작가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지리산 뱀사골 인근의 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제철음식학교에서 봄이면 앞마당에 장을 담그고 자연의 속도로 나는 재료들로 김치를 담그며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해 50여 가지의 밥을 한다. 쉽게 구하는 재료들로 빠르고 건강하게 밥상을 차리는 쉬운 조리법을 교육하고 있다. 쉽게 장 담그는 방법을 기록한 ‘장 나와라 뚝딱’, 밥을 지으며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밥 짓는 법과 함께 기록한 ‘밥을 짓다, 사람을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