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봐.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지”
한바탕 울고 난 기범이가 치수의 죽음을 일러주러 온 나졸에게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시신 두는 칸에 있는데 세 번 검시한 후 숲정이로 내갑니다. 해 떨어지거든 후문에 와서 인수허시우.”
“울지는 않았소?”
“다른 사람보다 잘 견딥디다.”
박치수를 수발하느라고 일 년 남짓 몸 붙이던 방과도 이별이라 사람들은 챙길 것을 챙겨 손수레에 실었다. 오후부터 중영 후문에서 기다리는데 어둠이 내리자 박치수를 포함해 몇 구의 시신이 마차에 실려 나왔다. 시신을 인계받아 손수레에 싣고 거적을 덮은 후 한바탕 울고 나서 그들은 싸전다리를 건넜다. 가파른 흑석골 대신 꽃밭정이를 지나 구이동에 이르자 끌던 수레를 놓고 억구지가 백부자네에 불을 지르겠다 난동을 부렸다. 기범이와 필상이까지 나서서 말리는 사이 병호와 희옥이가 번갈아 수레를 끌었다. 오르막이 시작되자 억구지는 제가 하겠다며 다시 수레를 잡았고 나머지가 땀 흘리며 민 끝에 숯막에 도착하자 동이 텄다. 언제 마련했는지 숯막에는 관과 수의가 준비되어 있었다. 박치수의 집에 연락하면 부모는 몰라도 형제들이 올 것이므로 염은 그때 할 작정이지만 억구지와 기범이는 치수의 낡은 옷을 벗겨 얼굴이며 몸을 젖은 천으로 닦았다. 그 일을 마치자 원정마을 사내가 탁주를 내오는데 먹은 것이 부실하여 다들 한두 잔에 시뻘게졌다. 억구지가 골짜기를 향해 서더니 갑자기 외쳤다.
“박치수가 죽었다! 내 친구 치수가 죽었다아!”
목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올 즈음 그는 퍼질러 앉아 큰소리로 울었다. 원정마을 사내도 곁에서 함께 우는데 황소 두 마리가 우짖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물기 어린 눈으로 기범이가 말하였다.
“저 봐.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지.”
병호가 잔을 들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건 더 위험하구.”
“그렇지. 그렇다고 안 할 수가 있나.”
기범이는 억구지와 원정마을 사내가 있는 곳에 가서 함께 울었다. 그 모습에 희옥이도 비질비질 울었고 필상과 병호는 괜히 잔을 들며 눈을 끔벅거렸다.
박치수를 매장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낯선 사람이 소금실에 찾아와 기범이의 말을 전하였다. 연락받는 즉시 숯막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병호가 한나절을 족히 걸려 숯막에 갔더니 지난번 박치수의 관이 놓인 자리에 새로 관이 놓여 있었다. 관을 안고 중년 아낙과 아들쯤의 남정네가 꺽꺽대며 곡을 하는데 기범이가 다가왔다.
“치수가 죽은 다음 날 백부자네로 팔려간 여인이 친정에 와서 목을 맸다누만. 백부자네는 시신을 인수하지 않겠다 하고, 여인의 집에서도 난감하게 여긴다길래 또 나설 밖에. 박치수 옆에 자리 하나를 더 만들자 했네. 깨 팔러 가서야 저것들은 부부가 되누먼.”
박치수의 무덤 옆에는 억구지와 박치수의 동생이 파토를 해놓았다고 하였다. 얼마가 지나자 필상이 찾아오므로 병호는 들은 말을 전하였다. 봉상까지는 연락하기 힘들어 희옥이는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박치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동무들끼리 관을 묘혈에 안치하였다. 여인의 어머니가 울다 실신하자 오라비가 숯막에 업고 가는 사이 남은 사람들이 흙을 붓고 떼를 입혔다. 어쨌거나 두 기의 무덤이 숯막 인근에 만들어졌는데 박치수 옆에 여인을 매장하고 나자 사람들은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졌다.
11.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을해, 1875)
봉상 송희옥의 집에는 필상을 위시한 네 사람이 봄밤을 즐기고 있었다. 병호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따로 스치거나 짬을 내 얼굴을 맞댄 적도 있기는 하였다. 자은도에 유배된 송진사가 일 년 삼 개월 만에 해배되어 병호와 희옥이는 인사차 종정마을을 찾은 일이 있었고, 필상이『영언여작(靈言蠡勺)』이라는 서양 선교사의 책을 구해와 기범이가 먼저 필사하고 기범이의 것을 병호가 필사하였으므로 제각각 대면도 하였던 것이다. 필상이 구해온『영언여작』은 몇 년 전 토론까지 했던『천주실의』의 핵심 내용을 다루는데 저쪽 사람들이 아니마라 일컫는 영혼 문제를 통찰하였으며 정약용과 이익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도 영감을 줬다는 책이었다. 특히 식물이나 짐승에게는 없는 영혼을 논하기 위해 명오(明悟)라는 개념을 동원해 정신작용과 천주의 존재를 설하는 내용이라 난해할 뿐 아니라 미심쩍은 대목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네 사람이 따로 만나 의견을 나눈 건 아니었다. 함께 논하지 않아도 저쪽 논변을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된데다 새로운 생활에 젖어 말미를 내기 어려운 탓이었다.
병호의 혼례에 참석해 장담하더니 희옥이는 딸을 낳았고, 기범이는 서당과 살림집을 오가는 외에 남원의 산포수들과 연을 더하고 있었으며, 필상은 다금발이의 행적을 수소문하는 한편 단양의 도인들을 만나면서 시절을 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