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소작농의 처지와 소작쟁의

2024-09-15     강광석 위원장
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선은 일제에게 살을 발리고 피를 빨렸습니다. 조선인 소작농은 조선인 지주에게 뜯기고, 총독부에게 매 맞고, 동척과 일본인 지주에게 착취당했습니다. 땅을 뺏기지 않기 위해 비굴했고 생산량의 80%에 달하는 소작료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뺏긴 조선 농민의 투쟁이었는데 죽창도 들지 못한 탓에 꽃잎처럼 쓰러졌습니다. 조선인 소작농의 소작쟁의는 생존을 위한 필연의 길이었습니다.

1926년에 농민 중 소작농은 75%인데 지주의 수는 한일합방 당시보다 두 배가 늘어났습니다. 일제는 조선인 지주를 키웠고 그들은 친일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08년 일제는 ‘지세(地稅)에 관한 건’이라는 법률을 공표했는데 ‘지세는 토지소유자에게 납부한다’고 해놓고서는 ‘습관 또는 계약에 따라 토지사용자가 가능한 경우에는 우선 징수함’이라고 하여 지주의 전횡을 인정했습니다.

일제는 조선 농장경영에 대자본을 투입했습니다. 1931년 일제가 발행한 ‘토지개량사업용람’에 따르면 100정보 이상 소유한 조선인 지주는 16명인데 비해 일본인 지주는 72명이나 되었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큰 일본민간지주는 조선흥업입니다. 조선흥업은 일본 제일은행을 경영한 시부자와 재벌의 자회사로써 1935년에는 1만7000여 정보를 소유했는데 소작인만 1만6000명에 달했습니다. 동척은 끊임없이 조선인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는데 1937년에는 그 면적이 5만262정보에 달했습니다.

도지권을 철저히 짓밟은 일제

일제강점기의 소작농의 처지와 소작쟁의에 대해 알아보겠는데 먼저 도지권(賭地權)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도지권은 그 용어가 남아있는데 경기도 소작료를 지금도 ‘도지’라 부릅니다.

도지권은 한마디로 소작농의 영구적 경작권입니다. 소작농은 자신이 소유한 경작권을 매매, 양도, 상속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시장에 가면 자릿세라는 것이 있는데 그 자리에 대한 권리는 권리금을 받고 거래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도지권은 지주가 소작농에 주는 권리가 아니라 소작농이 지주와의 관계에서 획득한 권리이며 지주가 마음대로 그 권리를 침탈할 수 없습니다.

도지권은 조선후기에 크게 성행했습니다. 황무지 개간, 둑과 저수지 축조과정에서 발생한 농지, 간척지, 원래는 농민소유의 땅이나 왕실이 세금을 거두는 궁방전으로 편입된 땅이 후일 소유권이 왕실이나 뒤에 일제로 넘어간 땅도 도지권이 성립되었습니다. 여기서 3분의 1이라는 숫자가 중요합니다. 도지권 매매가는 통상 원 지가의 3분의 1입니다. 소작료는 통상 평년 생산량의 3분의 1로 매깁니다. 이것은 법이 정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정한 것입니다. 땅 주인이 소작농으로부터 도지권을 매입하려는 경우, 원 지가의 3분의 1가격으로 매입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었습니다.

일제는 도지권을 철저히 짓밟았습니다. 이것이 일제 토지정책의 시작이며 본질입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하나의 땅에는 한 명의 주인만 있다’는 원칙(一地一走)을 고수했습니다. 이것은 소작농의 경작권을 인정한 종례의 관습을 배척한 것입니다. 소작농은 경작권을 잃고 지주와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을’의 위치로 추락합니다. 일제는 1920년에 급기야 법으로 ‘소작원의 소작지 양도 및 매매, 전당 또는 전대를 불허함’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도지권은 일제에 의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소작료 징수체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생산량을 일정한 비율로 나누는 분익법(分益法)과 생산량과 상관없이 일정한 액수를 지불하는 정액법(定額法)입니다. 그 외에 집조법과 간평법, 타조법이라는 명칭이 있는데 이것은 다 분익법의 일종입니다. 필자는 1970년생인데, 소작농이 논에서 발동기 걸어놓고 타작(벼에 타격을 가해 나락을 털어내는 행위)을 하면 하얀 도포자루 휘날리며 논바닥에 와서 나락 가마니 갯수를 지팡이로 세던 주인의 모습이 선합니다. 그가 하는 행위가 타조(打租)입니다. 땅 주인이 현장에 나와 수확량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 몫의 나락 가마니를 챙깁니다. 수확량의 반, 즉 50%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전라도 지방은 믿을 수 없겠지만 지금도 반수제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잘 알려진 소작쟁의는 1923년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와 1924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진행된 황해도 재령군 복률소작쟁의이다. 암태도는 소작료 문제로 조선인 지주와 싸웠고 복률은 소작권 문제로 동척과 일본인, 배신한 조선인과 싸웠다. 사진은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에 위치한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 모습.

현물납부 고집한 일제, 쌀 퍼 날라

1928년도의 소작형태를 분석하면(조선토지제도사), 삼남지방의 정액제 적용률은 22%에 불과하고 78%는 타조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주는 흉년이 들면 정액제로 하고 풍년이 들면 타조법으로 하자고 억지를 썼습니다. 파렴치한 짓입니다. 전라도 지방에서 소작료를 쌀로 납부하던 것을 대금으로 납부한 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안팎입니다. 지금도 상당수 땅 주인은 현물로 소작료를 받습니다. 조선 민중의 유전자에 쌀은 질기게 인박혀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이 농업국가로 남아있기를 바랐습니다. 일제는 소작료 납부 방식으로 현물납부를 고집스럽게 고수했으며 그렇게 확보한 쌀을 일본으로 날랐습니다. 일본은 1897년에 250만석, 1898년에는 460만석의 쌀을 수입했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의 대일 수출 방곡령은 일제의 숨통을 조이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일제는 쌀만 놓고 보아도 조선을 통으로 먹을만 했습니다. 일본의 식량 사정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크게 악화돼 1918년 동경의 쌀값이 석당 23전 하던 것이 당해 12월에 40전까지 올랐고 1919년 12월에는 53전까지 올랐습니다. 일제는 곧바로 조선에서 산미증산 계획을 입안했습니다. 일제는 아득바득 농로를 정비하고 농지를 개량하여 더 많은 쌀을 생산해 일본으로 날랐습니다. 이것을 한국의 일부 작자들은 ‘조선의 농촌근대화’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일제는 1920년대에 219만석을, 1936년에는 875만석을 실어 갔습니다. 1936년에 조선은 대흉년이 들었고 조선 민중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조선총독부 자료는 소작료율은 수확고의 50%를 표준으로 하지만 왕왕 실제 수확고의 60~70%를 초과하는 것도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훈구는 ‘조선농업론’에서 1935년경의 소작기간은 1년이 전체 소작지의 70%, 1~3년이 12.8%였다고 밝혔습니다. 소작농은 소작기간을 연장할 때마다 자신에게 불리한 소작계약서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소작농의 계약갱신 청구권은 물론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건 없습니다.

소작료 체납 시 소작농이 연대책임

동척은 ‘타조소작계약증서’ 제2조에서 ‘소작료액은 총 수확의 60%로 하고 총 수확고는 회사가 정하는데 복종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라이농장 소작규정’ 제12에서는 ‘수확고 사정원의 결정에 불복을 제기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개성시 개풍군 진북면 동척사원은 제일 잘 된 벼를 골라 70~80%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라고 폭로했습니다. 일제하 소작쟁의 투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호가 ‘사음교체’입니다. 마름의 한자표기가 사음(舍音)입니다. ‘사음하기가 군수나 관찰사보다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무라이농장의 소작농은 소작조합에 의무 가입해야 하는데 소작료 체납이 발생하면 연대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마모토 농장은 소작농 채무에 대해서도 연대책임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악귀처럼 악착같이 착취했는데 일본인 이름으로 된 대규모 농장이 1932년에 147개나 되었습니다.

1922년 9월 4일,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부 주최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에서 주창된 요구사항은 1. 종래의 소작료를 폐지할 것, 2. 소작료는 생산의 절반 분배로 할 것, 3. 지세 및 부가세는 지주 부담으로 하며 짚은 소작인의 소득으로 할 것, 4. 소작료의 운반은 1리 거리 내에서는 소작인 부담으로 하고 1리 이상은 지주 부담으로 할 것, 5. 지주 및 사음 등에 물품 증여의 습관을 철폐할 것, 6. 무상노역을 철폐할 것입니다.

짚은 소작농의 소득으로 잡자는 것인데 소박하고 절박합니다. 짚이 없으면 소를 먹일 수 없고 집도 이을 수 없습니다. 지주와 마름에게 철마다 씨암탉을 바쳐야 했을 것입니다. 무상노역은 지금도 잔재가 남았습니다. 지주집 벌초를 무상으로 하는 소작농도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암태도와 복률소작쟁의

일제강점기의 잘 알려진 소작쟁의는 1923년의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입니다. 조선인 지주 문재철의 과도한 소작료에 대항한 조선인 소작농의 투쟁이었습니다. 80%에 달한 소작료를 40%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이었습니다. 암태도 소작농은 폭력투쟁, 단식투쟁, 노숙투쟁 등 강인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목포경찰서에 연행자 석방 원정투쟁을 가서는 목포시민의 연대를 이끌어냈고 여론사업도 잘해서 동아일보에 대서득필 되기도 했습니다. 암태도와 목포의 일부 지주는 은근히 소작인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고 서울에서 변호사가 내려와 무료변론을 자처하기도 하는 등 여론도 우호적이었습니다.

결국 암태도 소작인은 소작료 40%를 쟁취했고 쌍방 간 고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일본 관리의 편파 처사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지주 문재철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는 웃지 못할 후일담도 만들게 됩니다.

또한 대표적인 소작쟁의가 1924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진행된 황해도 재령군의 복률소작쟁의입니다. 이것은 동척에 대한 조선인 소작농의 투쟁이어서 특별합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궁장터 즉 왕실 소유의 땅이었습니다. 수백 년 전부터 소작료는 반수제 즉, 50%를 납부했는데 18세기 영조 때는 3분의 1로, 고종 때는 4분의 1로 인하되었습니다. 경작권만 놓고 보면 도지권이 발동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이 동척으로 넘어가 복률 일대의 농민은 대대로 이어지던 경작권을 잃고 동척의 소작인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소작료가 두 배로 인상된 것입니다. 여기다가 일본인 이민자를 대거 들여와 원래 살던 주민을 변두리로 내쫓는 일까지 발생하여 소작권마저 뺏기니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복률의 소작농은 일본인 이민자 조직, 조선인 어용 소작인 조직, 총으로 무장한 경찰과 싸우는 삼중고를 당하며 6개월간 처절하게 투쟁했습니다. 암태도는 소작료 문제로 조선인 지주와 싸웠지만 복률은 소작권 문제로 동척과 일본인, 배신한 조선인과 싸웠습니다.

이민자가 차지한 땅 일부를 조선인 소작인에게 돌려주며 미납 소작료는 단계적으로 납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투쟁이 끝나고 약 270여 호의 소작농이 타지로 떠나야 했습니다.

나라를 뺏기면 백성은 마소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일제하 조선인 소작농의 처지를 쓰면서 가슴이 아렸는데 반수제니 무상노동이니 하는 말에서는 현재의 봉건 잔재가 무서웠습니다. 이것은 유전과 같은 것인데 알 수 없는 곳에서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마치 씨내림과 같습니다. 원래는 이번에 남북의 농지개혁까지 쓰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3회가 남았는데 서둘러야겠습니다. 현실의 농지문제와 해결방안을 중심으로 3회를 채울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