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익기만을 기다린 논, 갈아엎자 침묵이 길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나락 익기만을 기다렸다. 일년내내. 이윽고 알곡이 익어 고개 숙인 벼들로 황금물결을 이룬 들녘은 보기에도 참 풍요로웠다. 추수가 시작되자 미곡종합처리장(RPC)으론 적재함 가득 벼를 실은 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갔다. 그러나 RPC 바로 맞은 편에 펼쳐진 들녘에선 ‘수입쌀 반대’, ‘쌀값폭락 저지’, ‘쌀값 보장’ 등의 깃발을 매단 트랙터가 나락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콤바인으로 수확을 한다 해도 무방할, 추수가 코앞으로 다가온 논이었다.
콤바인으로 추수해 톤백에 쏟아내야 할 알곡들이 진흙에 속절없이 파묻혔고 짓이겨졌다. 추수하고 남은 볏짚이 놓일 자리에 알곡이 산산이 흩어졌고 트랙터가 지난 자리마다 진흙으로 범벅된 벼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조생벼 오대쌀로 유명한 강원도 철원의 8월 말, 본격적인 추수가 시작되는 시기에 황금들녘을 갈아엎는 트랙터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생경했고 의미 또한 남달랐다.
봄부터 볍씨를 틔워 모를 심고, 풀 관리, 물 관리하며 자식처럼 키워온 벼를 제 손으로 갈아엎는 농민들의 심정이 어떠할지 차마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다만, ‘쌀값은 농민값’이라 여기는 농민들에게 10개월째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는 쌀값이, 8월 현재 17만원대를 기록해 역대급 폭락을 갱신하고 있는 쌀값이 결국 농민들을 논 갈아엎기 투쟁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 강원도연맹과 철원군농민회가 지난달 30일 강원 철원군 동송읍 철원새마을금고 미곡종합처리장 인근 들녁에서 ‘쌀값 보장! 쌀수입 반대! 논 갈아엎기 투쟁’을 진행했다.
논 갈아엎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진행한 농민들은 “쌀값이 지난해 10월 21만7,552원(정곡 80kg)에서 올해 8월 17만7740원으로 무려 18.3% 폭락했다. 그야말로 역대급 폭락”이라며 “수확기 쌀값 20만원을 보장하겠다던 윤석열정부는 양곡관리법 개정안도 거부한 채 쌀값 폭락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게다가 쌀값 하락 원인이 과잉생산에 있다며 농민들을 탓하고 있다. 후안무치한 일이다”라고 강하게 규탄했다.
덧붙여 농민들은 “우리나라는 곡물자급률이 20%에 불과한 세계 6위 식량수입국이고 쌀 자급률은 94%에 불과하다”며 “쌀값 하락의 진짜 원인은 매년 미국, 중국에서 들어오는 40만8000톤의 수입쌀 때문이다. 정부는 쌀 수입을 당장 중단하고 즉각적인 쌀값 대책 수립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트랙터가 1800여평 논을 갈아엎은 뒤, 진흙 범벅인 채로 논 밖으로 나왔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논둑에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본 농민들은 노랗게 여물어 고개 숙인 알곡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이구동성으로 “농사 참 잘 지었다”는 말만 되뇌었다. 그리고 침묵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