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좌절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2024-08-18     강광석 위원장
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란은 여명의 징표입니다. 민란의 시대가 가면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역사가 폭발할 때, 지도자는 그 포연 속에서 등장하는데 고려의 왕건과 조선의 이성계가 그러합니다.

통일신라 820년 전후에 가뭄이 극심했습니다. 백성은 굶어 죽는데 정부는 세금 독촉만 했습니다. 중앙귀족은 왕위 다툼에 바쁘고 지방호족은 세금을 전가하니 백성의 인내심이 한계선을 넘은 것이죠. 신라의 중앙집권은 100년에 걸쳐 질기게 무너집니다. 889년, 진성여왕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백성들에게 또다시 세금을 독촉하자 신라는 전국이 농민 봉기에 휩싸였습니다.

우후죽순처럼 계통 없이 불쑥 솟아난 항거 집단을 역사는 초적(草賊)이라고 부릅니다. 초적의 지도자인 양길의 부하가 궁예인데 그가 새나라 태봉을 새웁니다. 궁예의 부하가 왕건입니다. 그가 고려를 세웁니다. 그는 모든 토지의 세금을 생산량의 10분의 1로 단일 적용합니다. 왕건은 자신의 집권 기반인 지방호족의 권리는 인정하고 경쟁에서 밀린 왕족 일부의 토지만 몰수해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고려말 집권세력은 경쟁적으로 땅을 늘려 대지주가 됩니다. 정도전은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는데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져서 생존할 수가 없게 되자 유랑민으로 되거나 심지어는 도적으로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망이 망소이는 1176년에 천민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며 일어났고 노비 만적은 이로부터 20년 후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며 노비해방을 주장합니다. 노비 만적은 최고 권력자 무신 최충헌을 죽이고 개경으로 진격하자고 주장합니다.

초적과 망이 망소이, 노비 만적은 성씨가 없는 최하층 계급이었는데 그들의 항거는 그 시대 개혁세력의 개국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토지개혁과 조세개혁을 단행했는데 지배계층의 땅문서를 몰수해 불태우고 10분의 1 세제를 복원했습니다. 그것은 전면적인 공전제는 아니었습니다. 양반의 토지 지배를 인정한 일시적 조치에 불과했습니다.

조선후기 1811년, 홍경래가 ‘관서의 난’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관서는 평안남북도입니다. 서북지방에 대한 고착화된 차별정책과 삼정(三政)을 통한 가혹한 조세 착취가 원인이었습니다. 삼정은 토지에 매기는 조세인 ‘전정’(田政), 군사경비로 거두는 ‘군포’(軍布)와 지방재정을 보충하는 ‘환곡’(還穀)을 의미합니다. 영·정조 시대가 끝난 이때로부터 19세기 100년을 ‘민란의 시대’라 합니다.

조선의 민란은 새 나라 건설의 동력을 상실한 채, 망국의 아픔 속에 역사적 사실로써 소멸한다. 갑오농민전쟁을 진압한 일본은 승전국의 지위를 획득했고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탈하며 토지를 빼앗기 시작했다. 박홍규, `동학군, 마지막 밥을 받다', 2014, 110×56cm, 목판화

19세기 100년 ‘민란의 시대’

1862년 그해 경상도 18개 고을, 전라도 54개 고을, 충청도 43개 고을에서 농민이 봉기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진주 봉기’입니다. 경상우병사 백낙신과 진주목사 홍병원의 수탈을 참을 수 없었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농민들은 낫과 쇠스랑을 들고 진주성을 점거했습니다. 그 일로 부패 관리들은 귀향을 갔지만 봉기 주동자들은 처형당했습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봉준은 이 민란의 시대 한복판인 1855년에 태어납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지도자로 활약했고 일본군에 체포되어 이듬해에 사형됩니다. 그는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을 폐정개혁안 12조에 명시했습니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인민의 기본인권을 보장하며 토지개혁을 분명하게 명시함으로써 한 시대의 개혁 강령으로써 그의 뜻은 강성합니다. 갑오농민전쟁은 계급운동이며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이었습니다. 농민군은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장흥 석대뜰에서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무력으로 시대를 도모한 이들의 정신은 한말 의병운동과 항일 무장투쟁으로 이어집니다.

농민이 주도한 갑오농민전쟁과 달리 엘리트 관료집단이 주도한 개혁은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그리고 광무년 개혁에서 토지문제가 논의조차 되지 않고 문란해진 조세제도와 관제의 개혁에 주력한 이유는 이를 주도한 이들이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관념이 뿌리 깊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든 관료양반지주들의 이익을 고수하며 기존 지주제의 유지를 선차적 과제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토지제도사’에서 박시형이 지적한 대목입니다.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탈한 일본

한말 개혁가들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후에 대부분 민족의 반역자로 전락했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조선의 민란은 새 나라 건설의 동력을 상실한 채, 망국의 아픔 속에 역사적 사실로써 소멸합니다. 조선후기는 신분제 철폐와 토지개혁이 시대적 과제였으나 이것을 밀고 갈 지도자와 정치세력은 죽거나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은 식민지 쟁탈전의 파고 속으로 빠져듭니다. 갑오농민전쟁을 진압한 일본은 승전국의 지위를 획득했고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탈합니다.

1887년에 일본육군성은 조선에 ‘조선측량파견대’라는 것을 침투시켰습니다. 이들은 약장사와 박물관 학자로 위장하여 곤충채집과 광물탐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각지를 다니면서 주요 지형지물과 지방들을 10년간이나 조사 측량했습니다. 이때의 측량자료와 지리 정보가 청일 전쟁과 갑오농민전쟁, 토지조사사업의 기초자료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1898년에 벌써 13도의 요충지마다 토지를 사들이고 가옥을 짓고 상점을 설치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또 군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나주와 영광, 영산강 일대의 땅을 대규모로 사들이고 대구와 동래 등지에도 수많은 가옥을 지어놓고 자신의 조계지를 확대합니다.

서울 이태원 등 12개 동에 군용지 팻말을 붙여놓고 주민들을 내쫒았습니다. 이른바 용산 일본군 기지, 미군 기지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에 항의하는 주민을 일본 헌병대가 총 쏘아 죽였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전에 강탈한 토지는 8만6950여 정보였고 수많은 도시주택과 건물터가 일제의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일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을 통으로 먹을 요량으로 더 대담한 작전을 구상합니다.

일제는 1908년에 동양척식회사를 설치하는데 여기서 척식은 척지(拓地)와 식민(殖民)의 줄임말입니다. ‘식민지를 개척하여 자신의 국민을 정착시킨다’는 뜻입니다. 동양척식회사는 일본의 대 조선 경제 침탈의 첨병 역할을 수행합니다. 일본으로 쌀을 실어가는 것이 동척의 주된 임무였습니다. 동양척식회사의 물적 토대는 조선의 토지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농경사회였고 주민의 80% 이상이 농민이었습니다. 농촌의 기본생산수단은 토지였고 그 토지에 얽매인 농민을 지배하면 조선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일제는 조선지배의 첫 일성으로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실시합니다.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을 하는 목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본인을 경작시키기 위한 토지를 확보하는 것, 둘째는 세금명부를 만들어 토지세를 부과하는 것, 셋째는 현존 지주들의 이익을 옹호해 자신의 통치기반을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에 나선 일제의 목적

일제는 1910년 3월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 조사항목을 명시합니다. 토지소유권 조사, 토지가격 조사, 토지 지형지모의 조사가 그것입니다. 토지소유권 조사에서는 토지소유자와 토지의 위치, 지목, 면적, 필지별 위치 그리고 경계를 지적도에 표기했습니다. 토지가격 조사는 토지의 시가와 임대가격, 수익성을 조사했으며 지형지모의 조사에서는 측량을 통하여 지도상에 토지의 모양을 그려냈습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소유권을 보호하며 지세부담을 공평히 하고 토지의 개량과 생산을 증진한다’고 선전했는데 그 ‘보호’와 ‘공평’과 ‘증진’의 주체는 일제이며 목적은 착취였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주목한 것은 조선인 지주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인 지주의 권리를 보장하여 그들을 조선 식민지 통치의 동맹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일제는 지주위원회를 만들어 토지소유권 분쟁 시 지주의 입장을 대변하게 했는데 지주가 농민의 땅을 자신의 소유로 기재하여 등록해도 눈감아 주었고, 농민과 소유권 분쟁이 붙으면 대부분 지주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 지배’를 최상의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친일파는 그렇게 탄생합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전에 4만6754명이던 지주는 조사 후 1919년에는 9만386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동척과 친일 조선인 지주는 조선 지배의 중심축이 됩니다.

일제는 토지조사법 제 5조에 ‘지주는 정부가 제정한 기간 내에 자기 토지를 정부에 신고할 것이다’라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당시 절대다수의 농민은 한자를 읽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신고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신고서에는 ‘성과 이름을 호적에 등록된 것과 동일한 문자와 획으로 써서 기재할 것’이라 했는데, 호적은 대부분 대필자가 썼기 때문에 이를 찾지 못하면 땅을 뺏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원래 조선 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결수연명부(토지대장)에 근거하여 신고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자신의 땅이 누락된 농민, 원래 소유자가 뒤바뀐 경우에 농민소유자는 이를 되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농민소유자와 조선인 지주가 분쟁이 붙으면 대부분 조선인 지주의 손을 들어 주었고 국유지와 민유지가 분쟁이 걸리면 대부분 국유지로 판정했습니다. 문중 땅과 개인 땅이 분쟁이 붙으면 문중 땅 손을 들어 일제가 가져갔고, 마을의 하천부지나 목초지는 대부분 공유지로 판정하여 또 일제가 가져갔습니다.

조선후기부터 궁방전이 많았습니다. 왕실에서 직접 소유한 땅이 있고 세금만 거두어들이는 땅이 있는데 전자를 유토궁방전, 후자를 무토궁방전이라고 합니다. 궁방전은 기본적으로 국유지로 보고 일제가 전부 다 가져갔는데 세금만 거두고 소유주가 농민인 토지도 일제는 궁방전으로 간주하여 빼앗습니다. 일제는 농민이 직접 개간하여 세금까지 낸 토지를 국유지로 둔갑시켜 탈취했고 화전은 대부분 임야로 처리해 국유지로 등록했습니다. 일제는 둔전, 역전, 공신전 등 모든 국유지를 탈취했고 향교전, 서원전, 중종전, 마을 공유지들도 탈취했습니다.

토지조사사업 후 소작농이 된 농민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일제는 약 100만여 정보의 소유권을 동척으로 이전했는데 조선왕조의 국유지가 약 13만3633정보, 농민들의 사유지와 부락 및 중종 소유지 등 약 90여만 정보였습니다. 일제는 산림도 이런 방법으로 약탈했는데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끝나는 시점에 ‘조선임야조사령’을 발동하여 산림 160여만 정보 중에 130여만 정보를 국유림으로 귀속시켜 강탈합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나고 조선농민은 절대다수가 소작농이 되었으며 조선인 지주는 일제와 결탁해 친일의 길로 나아갑니다. 약 30여만명의 농민이 조선 국유지가 동척의 땅으로 둔갑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수많은 농민이 집 앞 텃밭까지 뺏기고 최하층 생활을 강요받았습니다. 땅을 뺏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입니다. 3.1만세운동으로부터 1949년 토지개혁까지 30년이 걸리는데 이 기간에 땅을 잃은 민중은 피죽을 먹으며 삶을 연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민중의 항거를 새시대 개국의 동력으로 삼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조선의 지식인은 개혁의 좌표를 잃고 친청이니, 친일이니, 친러니 따지면서 몰려다녔으나 개혁의 근본문제를 자주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대부분 반역의 길에 들어서고 맙니다.

남북한 공히 토지개혁 때,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자료가 토지소유권을 밝히는 기초자료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