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㊳] 정선오일장, 그곳에 사람이 있고 나물이 있었다
지리산 뱀사골을 출발해 정선오일장을 찾아가는 길은 정말 멀고도 험하여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날을 잡다 보니 하필 일요일이어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터 입구부터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울 정도로 방문객이 많았다. 더구나 보통의 시장이라면 이쪽저쪽 양쪽을 다 둘러보면서 다니게 했을 중앙 통로에까지 판매대를 설치해서 더 그랬다. 더 많은 상인들을 만나고 더 다양한 물건들을 만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는 곳이 되었다. 앞사람 머리만 보면서 가다보니 좀 더 머물고 싶은 매대가 있어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래도 그 틈에 명함을 받고, 삶아 무쳐 놓고 맛을 보이며 파는 나물들 맛도 본다.
5월의 정선장엔 곤드레나물과 누리장대나물이 가장 많이 보인다. 어수리, 오가피, 명이, 돌미나리, 엄나무순, 두릅, 참나물 등 웬만한 봄나물들이 두루두루 다 나와 있다. 거기에 더해 강원도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떡취’가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온다. 떡취는 사실 밥반찬으로 먹는 나물이 아니다. 쑥처럼 떡에 넣는 취나물인 수리취의 별명이다. 생수리취나물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떡맛을 볼 수 있도록 바로 만들어서 파는 방앗간도 있다. 수리취찰떡, 수리취가래떡, 수리취절편, 수리취팥떡 등등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그 복잡한 중에도 꽤 오래 붙잡는다.
어린 시절 이맘 때를 기억해보면 수리취 반, 찹쌀 반의 비율로 떡을 해주셨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벌집에서 채취해 보관하던 밀랍을 녹여 떡을 코팅해 주셨었다. 그렇게 만든 떡은 잘 굳지 않고 쉽게 상하지도 않아 오며 가며 한 개씩 집어 먹는 재미가 제법 좋았다. 수리취를 많이 넣은 떡은 냉장고 안에서도 하루이틀쯤은 굳지 않는다. 물론 맛도 참 좋다. 그야말로 별미떡 중의 별미떡이 바로 수리취떡이라 할 수 있다. 조금 구입했는데 어머니의 떡맛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대로 괜찮았다.
정선은 강원도의 꽤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팔도 풍물장 같은 요란한 느낌은 적다. 이 구석 저 구석 기웃거리며 다녀보면 오랜 시간 지켜온 재래시장의 정감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특히 시장의 골목 안으로 들어서야만 보이는 정선만의 음식들은 더욱 그렇다. 메밀국수를 ‘콧등치기’라 써 붙인 식당들이 허기를 부른다. 절인 배추만으로 뽀얗게 부쳐내는 춘천이나 홍천의 메밀전과는 달리 붉은 김치로 부쳐내는 메밀전도 이 지역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 만날 수 없고, 정말 좋아하거나 단골인 지역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메밀국죽’도 있다. 강원도만의 별미장인 막장을 풀어 끓인 죽인데 특이하게 메밀쌀로 끓인다. 서울 사람이 이 죽을 먹고는 메밀로 끓인 장칼국수 맛이 난다고 했다. 강원도식 장칼국수는 들척지근하게 끓인 고추장칼국수가 아닌, 그야말로 ‘막장칼국수’이기 때문이다. 바쁜 일요일의 장날이었는데도 운이 좋게 오랜 시간 정성들여 끓여주시는 식당 주인을 만나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지리산의 향신료를 제피라 말한다. 그리고 강원도의 향신료는 누가 뭐래도 ‘산초’다. 산초는 들기름과 함께 두부와의 궁합이 아주 좋다. 그래서 나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제피를 구입해 갈아두고, 산초는 구입해 장아찌도 담근다. 산초를 구입하면 가장 먼저 두부를 부쳐 먹는데, 이곳 정선오일장에서 두부찌개를 산초로 끓여서 파는 곳을 만났다. 산초두부찌개의 그 맛이 마치 익히 아는 맛처럼 저절로 그려진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식당으로 돌진했다. 사람이 많은 날이라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드디어 찌개가 내 앞에 나왔을 때, 아니 내 앞에 놓인 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을 때, 너무나 익숙한데 맛있는 그 맛에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먼 길을 달려온 수고가 이 찌개 하나로 충분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들고 갈 짐을 만들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고 출발했으나 결국 나는 지갑을 열어 메밀쌀을 한 되박 사고, 산초기름도 한 병 사게 되었다. 이런 곳이 오일장이어야 한다. 사고 싶은 것이 없으면, 다음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는 장이 될 것이다. 그러다 오일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 오일장의 발전적인 지속을 위해 기여를 한 기분으로 으스대며 나는 양손에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장을 나와 정선을 떠났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아쉬워 뒤를 돌아보았다.
정선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듣거나, 따라 흥얼거리다보면 이상하게 그 어떤 아리랑보다 늘 구슬프게 느껴졌었다. 높은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가야 만날 수 있었던 정선만큼이나 우리의 굴곡진 인생을 잘도 표현한 노래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여행이 그 생각을 바꿔놓았다. 정선은 맛있고 아름다워 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온전히 오일장 때문이다.
지리산 뱀사골 인근의 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제철음식학교에서 봄이면 앞마당에 장을 담그고 자연의 속도로 나는 재료들로 김치를 담그며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해 50여 가지의 밥을 한다. 쉽게 구하는 재료들로 빠르고 건강하게 밥상을 차리는 쉬운 조리법을 교육하고 있다. 쉽게 장 담그는 방법을 기록한 ‘장 나와라 뚝딱’, 밥을 지으며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밥 짓는 법과 함께 기록한 ‘밥을 짓다, 사람을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