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기 계’를 아십니까

  • 입력 2009.12.14 11:43
  • 기자명 한영미 (강원도 횡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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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을에선 대동회다 반회다, 양수기 계다 하면서 하루가 멀다하게 모일 일이 많다. 이렇다 할 재미있는 일이 없는 요즘 그래도 이웃들과 함께 밥해먹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날들이라 12월만 되면 다른 일에 우선해서 날을 받는다. 양수기 계 하는 날. 바로 물세 걷는 날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물세를 내나? 의아해하실 것 같은데, 척박한 강원도 땅에서 농사짓고 살기위해 농민들이 보 만들고, 개울물을 끌어다가 농사짓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자조적인 계로 1년 사용료를 내면 농민들이 돌아가면서 물 관리를 해주고, 사용하고 남는 돈이 모이면 동네사람들에게 농협이자 정도로 대출해주는 제도를 갖고 있는 계이다.(횡성군수가 관리자로 되어있어 전기료나 수리시설비는 보전되고 있다.)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이 처음 농사를 지어야 했던 우리에게 양수기 계에서 빌린 돈으로 농사를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한 만큼 마을주민들이 상부상조하는 계이다. 4반까지 있는 동네지만 4반만으로도 독자적인 계를 운영할 만큼 오랜 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수기 계를 30년 넘게 현재까지 운영해 오는데 마을 안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수로가 망가지거나 저수지준설을 해야 한다거나 하면 마을주민들은 회의를 거쳐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투쟁으로 없앤 수세를, 남들은 내지 않는 물세를 내고 농사를 짓지만 나는 물을 농민들이 관리하는 문화가 나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일 년에 한번 모여서 올 한해 농사를 점검하고 내년 물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개울물을 끌어올려 농사를 짓다보니 양수기만 망가지지 않으면 별 문제없이 농사지어 왔는데 몇 년 사이 개울물이 마르면서 논에 물대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점점 어르신들이 농사 짓는게 어려워진다.

젊은 사람들은 집집마다 개인관정을 파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어르신들이나 젊은 사람들이나 어떻게 농사지어야 할는지? 하는 고민 속에 세상 돌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마을사람 사는 이야기가 한참 오가는데 우리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원동할머니가 아프시단다.

여성농업인센터일한다고 읍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간간이 듣는 마을소식이 이렇게 누가 아프다더라, 누구 네가 집을 나갔 다더라 안 좋은 소식만을 들을 때가 많은데, 원동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한평생 자기 땅을 가져본 적이 없는 할머니, 남들이 일구지 않는 땅을 평생 괭이로 쪼아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할머니.

봄 되면 할머니네 텃밭에는 언제 심으셨는지 각종 채소들이 앞 다투어 자라나고, 남들처럼 비료 농약치지 않아도 곡식하나 채소 하나하나가 다른 집에 비해 튼실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할머니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짓는 것을 배우고 싶어 안달을 했던 지난 몇 해 동안 제대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아프시다 하니 마음이 바빠진다. 할머니처럼 농사 잘 짓고 싶다고 했을 때 웃으면서 “놀러와”하시던 할머니가 쾌차하셔서 내년에도 올해처럼 콩 심고 팥 심고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한영미
강원도 횡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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