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북쪽·1

  • 입력 2009.12.14 11:40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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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한반도를 완전하게 장악해버린 11월 29일 밤 열 시. 금학산에서 스멀스멀 기어 내려온 안개가 도시를 온통 뒤덮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동송읍의 어느 뒷골목 술집에 나는 앉아 있었다. 철원! 철원은 내게 강원도가 아니라 경기도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은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스물한 살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그렇게 각인되어 있었다. 안개의 고장 철원. 스물한 살 내 동정을 거두어 간 곳. 아니 내가 동정을 묻은 곳. 그리고 화지리! 낮에 철원농민회 김용빈 형과 마신 술기운이 모세혈관에서 다 빠져나가 버리자 잠 속에서 추방당한 알코올 중독자처럼 거리를 배회하다가 아득하게 먼 이십구 년 전 기억을 더듬어 이 골목으로 기어들었던 것이다.

시외버스 차부까지 태워다 준 김용빈 형이 보는 앞에서 차표를 끊고 헤어져 버스에 올랐으나 차마 떨치고 가버리기에는 철원은 첫사랑 여자처럼 미련이 많았다. 버스 안에까지 올라와 손목을 잡는 미련에 나는 기꺼이 포로가 되어 버리기로 작정을 했고, 어젯밤 묵었던 여숙에다 짐을 풀었다.

“오랜만이야. 여긴 웬일이야, 도대체 여긴 왜 왔느냐고?”

나는 몸을 움찔했다. 어둠 저쪽에서 비무장지대를 관장하던 삼십 년 전의 안개가 이죽거리면서 물어왔던 것이다. 나는 물끄러미 안개를 바라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머뭇거렸다. 내 행동이 이상했던지 주막 아낙네는 연신 옆 눈으로 힐끔거리며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에 새겨지는 쓴웃음을 소매로 쓰윽 문질러 지워버린다. 철원의 안개는 내 환상통과 같은 것이었으니 주막 아낙네로선 요령부득일 수밖에.

“한 일 년, 아니면 그것보다 조금 더 근무를 해서 그 돈으로 나가서 장사를 하고 싶어요. 학교는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는데 그래도 되지요, 아부지?”

낮에 금학산을 내려오며 했던 아들의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돌더니 나중에는 심장을 세차게 툭, 툭 차대기 시작했다. 머쓱하게 웃다가 고개를 숙이던 아들놈 얼굴이 떠올랐다가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빌어먹을! 나는 소주잔을 탁 뒤집었다. 제대를 해도 대학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아들의 말이, 군대에서 돈을 모아 장사를 하겠다는 녀석의 말이 쇠꼬챙이가 되어 가슴을 후볐다.

낮에 금학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아비로는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고 심하게 자책을 했다. 그랬다. 나는 능력 없는 애비였다. 아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어 안달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방 국립대학이 아니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아 두었으니 별 항변은 없었다. 나는 순순히 지방 국립대로 들어간 녀석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힘에 부치지 않는 학비가 그렇게 생광스러울 수가 없었다.

술 한잔에도 달달 떨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감스러운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일학년을 마친 겨울방학이었다. 영천에서 마주한 술자리에서 아들은 느닷없이 그 말을 끄집어내어 속내를 좌악 펼쳐보였다. 나는 뜨끔했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었고 과장된 말로 끙끙 앓기만 했을 뿐이었다.

“많이 늙었군. 그 나이에 여긴 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안개가 슬며시 손을 잡아왔다. 나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안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집요한 놈! 허벅진 육덕의 몸매를 가진 이 년은 자주 낮은 저음의 목소리를 내 귓속에 퍼부으며 다가와 이마를 쓰다듬다가 입술을 더듬었고 스멀스멀 겨드랑이로 파고들어 와 마침내 샅을 더듬으면 나는 안개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온몸에 끈적끈적한 타액을 처바르며 집요하게 내 몸을 핥던 안개의 혓바닥이 슬며시 귓불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잽싸게 귓불을 잡아 뜯었다.

입대하는 아들이 제 아비가 군대생활 했던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믿기지 않았다. 전방근무를 희망하던 아들은 그 제도에 상당히 매혹되어 기꺼이 자원을 했는데 세상에나! 애비가 근무했던 사단의 수색대로 가더니 중대뿐만 아니라 소대까지 같은 곳으로 배치되었다.

어느 날 아들놈 소대장이 전화로 그 사실을 통보해 왔을 때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관통해가던 그 전율은 아직도 아찔하게 남아 있다. 이 질긴 인연이 제발 악연이 되지 말기를! 악착같은 대한민국 국방부여 잔인하구나, 잔혹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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