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토란

정 영 이 - 전남 구례군 용방면 죽정리

  • 입력 2007.10.06 19:05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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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이 전남 구례군 용방면 죽정리
“몸썰난다. 해도 해도 넘타허네. 뭔 놈의 비가 저리 쉬도 않고 온다냐.”
칠순이 넘으신 우리 어머님. 추석을 앞두고 애가 타시는 모양이다. 가을 수확하여 돈을 사시기도 했던 밭곡식이며, 추석 무렵에 톡톡하게 주머니를 채워주던 토란이며 밤들이 풍작은 고사하고 도대체 거둬들일 시간조차 주지 않고 비만 내리고 있으니 어머님의 발 동동 구르시는 마음이 족히 이해가 간다.

올 해 배추 값이 괜찮을 듯싶어 넷째 아들 몫까지 김장을 하고 남으면 몇 포기 팔아보실 요량으로 넉넉하게 모종을 사다 곱디곱게 심으시더니 절반 이상이 비로 인해 녹아 버렸고 양념거리로 심으신 대파며 쪽파도 망쳤다. 김장거리도 장에 나가서 사와야 할 형편이다.

“먹을 것으로 장난치는 놈들”

비를 원망하시면서도 잠깐이라도 날이 개면 어머님은 어김없이 들로, 밭으로, 산으로 나가신다. 배추 밭, 녹아 비어 있는 자리에 다시 모종을 심어야 한다며 육묘장에 가서 모종을 사오라고 하시는데 어디 배추 망친 집이 우리 집뿐이겠는가? 육묘장엔 이미 모종이 동이 난 상태이고 주인은 이런 일기를 미리 예견하고 넉넉하게 모종을 키워놓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덕분에 어머님과 종자 얘기를 나눴다. 과거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 두었던 종자들을 어느 순간부터 당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채종하지도 않고, 보관해야한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으셨단다.
때가 되면 동틀 무렵 이장이 “감자 종자 신청하세요, 콩 종자 신청 받습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 모두 당연하게 남보다 늦을세라 회관을 찾았고 세상이 편해졌다고 생각 하셨단다.

이야기 끝에 유전자 조작에 대한 얘기와 터미네이터 종자 얘기들을 해드렸더니 동네 할머니들, 야단들을 하신다. “천하에 몹쓸 종자(?)들이 먹을 것 갖고 장난치는 놈들이여!”
비가 잠시 멈칫한 틈을 타 산에 올랐다. “아이! 보란아, 어디서 줍고 있냐?” 태풍이 한바탕 휘몰아 가니 그야말로 우수수 떨어져 내린 밤을 일손을 사서 줍기엔 밤 값이 너무 좋지 않아 품삯도 안나와 혼자서 용을 쓰며 ‘에이, 비 때문에 밤도 좋지 않고 포기할까?’ 하던 차에 농사에 서툰 며느리가 늘 걱정이신 어머니가 동네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우리 밤을 주으러 오셨다.

반가우면서도 한편 칠순이 넘으신 분들을 밤 산에 오시게 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두 분 할머니는 쉬엄쉬엄 하시라는 내 말에 “너는 주을라 생각 말고 자루나 잘 챙겨서 따라 오고 우리가 주서논 것 저-기 길가에 모타 놔라. 있다가 보란 애비 메 나르기 좋게” 하시며 되려 밤 자루 옮길 아들을 배려하신다. 밤은 또 어찌 그리 잘 주으시는지. 내가 한 자루 주을 때 그 분들은 두 자루를 주으신다.

주은 밤을 선별하고 땀범벅이 되어 좀 씻어야겠다고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어머님이 전화를 하셨다. “아야, 농협에 좀 갔다 와야 쓰겄다. 요새 토란 값이 좋단디 오늘까지 밖에 안 받는단다. 농협 문 닫기 전에 얼른 갖다 주고 오니라.” 입은 채로 내려가니 그새 어머님은 빗속에서도 온전한 토란을 캐 잘 다듬어서 깔끔하게 자루에 담아 묶어 놓으셨다.

그런데 창고 옆 한 켠에 실하고 큼직큼직한 토란이 한바구니 담겨 있다. 저건 왜 남겨 놓으셨냐고 물으니 내년에 종자로 쓰려고 남겨 두신단다. “종자가 그렇게 위험허믄 나라에서 종자를 집집마다 냉게 놓게 해야제, 해년마다 새로 사서 심게 만들어! 미련헌 것들.”

내년에 토란종자로 써야겠다

우리 어머님, 평생을 땅과 함께 살아오신 지혜를 오늘 하루, 어머님의 일과 속에서 다시 배우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올 가을엔 들깨 가루 진하게 갈아 넣은 어머님의 토란국을 맛나게 먹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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