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 무덤을 생각하다

  • 입력 2009.11.23 12:08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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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영천에서 시티재를 넘어서서 안강으로 접어들자 구룡포로 가는 승용차 앞 유리에 간간히 빗발이 흩뿌렸다. 차를 모는 후배는 영천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즐거운지 연신 신들번들 웃는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내리 사흘 동안이나 치러야 할 문학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선배랍시고 학교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질을 해서 불러내 늦은 밤까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퍼먹인 일이 벌써 며칠 째인지도 모른다.
오늘 뜻하지 않게 구룡포로 가게 된 것은 순전히 후배 탓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행사는 시작되는데 자료집 편집이 아직도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심포지엄 발제를 맡은 대구의 한 평론가가 원고를 보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고 마감 약속을 이틀이나 어긴 어제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돌아간 후배가 무슨 일인지 새벽같이 전화를 걸어왔다. 빨리 나오소. 아직도 원고 안 들어왔구마. 다짜고짜 그렇게 건조한 말을 내 귀에 쏟아놓고는 후배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어젯밤 농민회 일일주점에서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오전 10시나 되어서야 나갔더니 그때까지도 원고는 도착하지 않았고, 후배는 자료집에서 심포지엄 원고를 싣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명쾌한 그의 결정에 흔쾌히 동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라믄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구마. 구룡포 가시더. 구룡포 시인한테 전화나 하소.”
고3 수능이 있는 날이라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후배의 제안에 나는 멍해졌다.
“구룡포? 내일이 마감이라 나 원고 써야 되는데 아직 뭘 써야 될지도 못 잡았다.”
“하이고 참, 구룡포 가자고 한 거는 내가 아이고 형님이구마. 그라고 소재는 내가 잡아 주끼요. 억수 이야기 아직 안 썼지요? 그 이야기면 충분하구마. 됐지요? 구룡포 갔다 와서 내일 새벽에 써소. 그깟 잡문 이십 분이면 충분하구마. 자 인자 가시더.”

속사포처럼 말을 마친 후배는 내 등을 떠민다. 걸핏하면 구룡포에 가서 콧구멍에 바람이나 좀 넣고 오자고 옆구리를 찌른 건 행사 준비에 넌덜머리를 낸 나의 푸념이었다. 거기 바닷가에는 사자머리를 한 시인이 있고, 그 여자 시인이 일주일 쯤 전에 갈매기 우는 소리가 들리느냐며 갯바위에서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억수가 양반들에게 절도 받아 묵었다 카더나?” 차가 출발한 뒤에 나는 구룡포 시인에게 전화를 한 후 안전띠를 매며 불쑥 물었다.

“하이고 참 형님도, 내가 그거까지 우예 아는기요. 형님이 한번 물어 보소.”
억수는 임진왜란 때 경주전투에서 일본군 칼 아래 쓰러진 양반의 종이었다. 의병으로 출정한 주인을 따라 전투에 참전한 노비가 어찌 무예를 몸에 익혔으랴.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 억수의 주인은 함께 참전한 자기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종이라도 살려서 집으로 보내고 싶었을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억수에게 집으로 가라고 했지만, 나라 없는 백성이 있을 수 없듯이 주인 없는 종이 어찌 가당키나 하냐고, 결연하게, 칼을, 들었으리라.

종의 주검은 거두었으나 주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주인의 아버지 친구들이 각지에서 만시(輓詩)를 지어 보내왔다. 그 종이를 태운 재를 주검 대신 관에 넣어 장사를 지내니 이 무덤이 시총이다. 시총은 영천 기룡산 자락에 있는데 그 주변 풍광이 가히 절경이다. 영남에서 소문난 명당으로 꼽힌다는 소문쯤이야 그 절경을 대하면 무색해진다.

억수 무덤은 시총 바로 아래 소똥무더기처럼 앉아 있다. 왕릉 같은 양반들의 무덤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억수 무덤 앞에는 근래 쥐코밥상 같은 작은 상석이 놓이고 ‘억수지묘’라고 새긴 표석이 섰다. 나는 가끔 그 앞에 설 때마다 양반의 후예들이 종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며 초라한 봉분만큼이나 쓸쓸해한다. 심사가 뒤틀려 왼새끼를 꼬는 내게 그 문중의 한 선배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그 말이 오래 내 가슴에 비수로 박혀 있다.

“주과포 차려놓고 양반한테 절 받는 종은 조선에 억수 하나밖에 없다 아이가.”

창문을 내리자 비릿한 바다냄새가 몸을 휘감는다. 시인은 상가에 들렀다가 조금 늦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저기 파도에 잠겼다가 드러나는 작은 갯바위가 눈을 시리게 했다. 그 갯바위에 겹쳐지는 억수 무덤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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