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 밭에서 여성농민으로 태어나다

  • 입력 2009.11.09 10:56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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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농사라는 것이 풍년이면 좋은 것이었지만, 언제부턴가 풍년이 농민의 한숨으로 돌아왔다. 특히 올해는 쌀을 비롯한 모든 농작물이 풍년으로 농민의 한숨으로 이어져 근심이 되고 있다.

감귤도 다르지 않다. 해걸이 현상으로 올해는 모든 감귤농가가 풍년에 풍년을 이루었고, 상품(2번과∼8번과)보다는 비상품(1번과)이 많아 농민의 근심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남원읍(제주도)은 전체 농가의 90% 이상이 감귤을 재배하고 있는 곳으로, 겨울의 길목인 지금부터 이듬해 1월말까지가 가장 바쁜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잔치도 없을뿐더러, 초상이 나도 괜히 눈치가 보이는 시기다. 흔한 말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하는 시기인 것이다.

감귤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는 우리 집도 다르진 않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귤 따기에 여념이 없다. 11월20일경부터는 상품을 따기로 계획을 세우고, 지금은 비 상품 감귤을 나무에서 골라내 따는 작업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감귤을 따는 내내 한숨만 쉬신다. 감귤 값이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른 집에 감귤을 따주러 가면 돈이나 벌지 우리 집 감귤은 따도 따도 한숨만 나오신다며 괜히 비상품 감귤을 한 움큼 따내 바구니가 아닌 감귤나무 밑으로 툭 던져버리신다.

그 마음을 조금은 알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농약이다, 비료다, 전정이다, 간벌이다, 온힘과 정성을 다해 감귤농사에 매달리고, 겨울을 기다렸건만, 감귤 값은 천정부지로 떨어지니 한숨만 나올 수밖에…. 그래도 1년 내내 자식같이 키운 감귤들이니, 산지폐기나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평생을 감귤농사에 올인 하신 시어머니, 물론 살아오면서 감귤 때문에 웃으신 날도 많으셨다. 대학나무라는 명성에 걸맞게 자식들 대학도 보내주고 자식 결혼식도 시켜준 고마운 감귤나무였기도 했었단다.

이런저런 푸념 아닌 푸념을 하시던 시어머니께서 불쑥 우리도 비상품감귤을 인터넷을 통해서 팔아볼까 하신다. 그러시다 이내 농민의 양심을 걸고 절대 그럴 순 없다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신다. 농민의 양심을 늘 강조하시는 시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올해 감귤 값을 잘 받지 못하면 1년 내내 사용한 농약 값이나 비료 값 등등이 그대로 농가부채로 남아 이자며, 원금이며 바닥나는 통장잔고를 걱정해 그러신다는 걸 잘 알기에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또한 감귤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더라도 우리가족만 감귤을 딸 수가 없어 일꾼을 부려야한다. 그러려면 매일 일당조로 현금이 나가야하는데 그 역시 농가부채가 될 우려가 있기에, 어머님 마음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이래저래 감귤을 따면서 한숨이 나오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본다. 결혼한 첫해에는 그런 저런 돈 걱정 없이 감귤만 땄었다. 그저 감귤 따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밭으로 갔었고, 작년에는 첫애를 낳고 몸조리 하느라 감귤 밭에 오지 못했었다.

그렇게 시집온 지 삼 년째인 올해서야, 농민의 아내로 여성농민으로 살아갈 ‘시작’을 해야 한다. 다시 처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고 여성농민으로의 시작을 감귤을 따는 가위질로 해본다. 지금 이 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은 농민들의 가위질 소리가 “또깍또깍”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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