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악마

  • 입력 2009.11.09 10:52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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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표 쓸란다.”

뜬금없이 그렇게, 친구는 말했다. 나는 조금 취해 있었다.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삼밭골 못물 위로 낮게 새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새들의 동선을 뒤쫓다가 친구의 말에 그만 놓쳐버렸다. 내 눈빛이 허공에서 잠시 흔들리다가 돌아온다. 물기가 전혀 만져지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건조해서 바싹거렸다. 나는 몽롱하게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와, 논밭 다 팔라고? 어디 좋은 데가 있더나?”
“아이다. 이 나라 궁민하기가 싫다. 나, 궁민 사표 쓸란다.”

친구는 국민을 ‘궁민’으로 발음했다. 술 탓이 아니라 경상도 영천 발음이다.

“너, 많이 세련됐다. 자격조건 충분하니 어때, 농민회 안 들어올래?”
“실타! 이 몸은 묶이는 게 죽어도 싫어서 농민회, 안 한다.”
단호하다. 농민회에 대한 그의 단호함은 십 년째 한 치의 빈틈도 없다.
“그 사표는 어디서 수리하는데?”
“농림식품부에 보내면 농민 사표니까 안 되고, 청와대로 보내야 궁민 사표 맞겠제?”
“어이, 꼴통보수, 그런데, 궁민사표는 와 쓰는데?”
“씨발늠아! 그건 내 보다 니가 더 잘 알잖아.”

나는 친구 얼굴에 꽂아두었던 시선을 거두어 삼밭골 못물 위로 던진다. 미끼 없이 던져 놓고 온 낚싯대 위로 천천히 노을이 걸리고 있다. 수면 위로 잔잔하게 깔리는 노을은 가끔씩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이 만든 파도에 살짝 흔들렸다 잔잔해진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 친구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니다. 우울증을 앓는다는 말은 틀렸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야 옳다.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 때문이다. 나는 그의 신념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을 훔쳐보는 내 심정은 사실 좀 즐겁다. ‘궁민 사표’를 쓰고 싶을 만치 믿었던 정권에 대한 그의 배신감을 나는 천천히 즐기고 있다. 나는 그가 가진 기대심리가 더 빨리, 더 많이 깨트려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음흉하게 웃음을 흘리고 있는 내 마음 속의 악마에게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라고 타이른다.

쌀값 폭락 문제로 농민들은 아우성인데도 저잣거리 장삼이사들은 한숨 섞은 걱정 한번 안 해준다. 모이기만 하면 정치판만 끄집어내어 난도질이다. 아예 도륙을 낸다.

“제발 그 정치판 이야기 좀 집어치워라, 신경질 나서 더는 못 듣겠다.”

버럭 화를 내며 농사꾼이 급하게 소주잔을 뒤집었다. 안주삼아 열심히 정치판을 씹고 있던 민주노총이 살짝 이맛살을 구겼다가 편다. 한국노총이 굼뜬 동작으로 농사꾼의 빈 잔을 채워주고는 소주병을 든 채로 시무룩해진 민주노총을 바라본다. 콧잔등을 눈빛에 찔린 민주노총이 서둘러 잔을 비운 뒤에 어깨를 떠는 진저리로 갑자기 조용해진 술청 안의 적막이 파르르 떨었다. 마약에 취한 인간들이 슬슬 발작을 시작할 무렵이다.
“우리가 와 글마들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싸우는지 내사 마 통 이해가 안 된다.”

지금까지 술 마시는 거 말고는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처럼 눈만 끔뻑거리고 있던 장사꾼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 때문에 반나마 남아 있던 소주병이 또 뒷전으로 물러난다. 죄 없는 소주만 작살이 난다. 싸늘하게 굳어버렸던 분위기가 슬며시 되살아난다. 논쟁은 또 다시 아까 돌아왔던 그쪽으로 옮겨간다. 누구는 한나라당 때문에 몇 잔을 더 비우고 또 누구는 민주당 때문에 몇 잔을 더 비운다. 보수정당은 늘 장삼이사들에게 술을 권한다. 불콰해지면 민주노동당도 덩달아 술 마시게 한다.

눈빛이 게슴츠레 해지면 세종시가 평양기생처럼 술을 따르고, 경기도교육감을 괴롭히는 행안부 장관도 술병을 들고 슬그머니 끼어든다. 대통령이 권한 술에 국회의원이 권주가를 불러주니 흥에 겨운 장삼이사들은 죽을 판 살 판 퍼마신다. 정부와 정치권이 부리는 교묘한 술수에 장삼이사들은 흠뻑 젖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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