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기의 농사이야기

내 시에 대한 변명

  • 입력 2007.09.23 16:47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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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도시에 사는 시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런저런 예기 끝에 최근에 발표된 내 시를 읽었다며 한 소리 한다. 듣고 보니 ‘이 대명천지에 아직도 격문을 쓰느냐’고 은근슬쩍 비아냥이다. 어째 농사짓는 일의 즐거움을 노래하지 못 하느냐고 힐난이다. 자주 듣던 말이다. 나는 전화를 끊고 이마를 짚는다. 중앙선 화물열차가 내 무릎의 관절통을 밟고 지나간다.


나는 시를 쓰면서 내 삶의 주변 풍경을 예찬하지 않았다. 내 시는 대부분 자제력을 잃을 정도의 풍자에서 출발했다가 그 분노에 스스로 매몰되곤 했다. 지난 세월, 수입농산물에 식탁을 점령당한 세월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광란의 춤을 추었고, 농민들은 변방의 망루를 지키는 수자리처럼 비루하게 살았다. 시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현장을 팽개치고 서정시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시류에 휩쓸렸다.

강대국의 논리인 ‘세계화’가 보편성을 획득한 시대에 영원한 소수민족일 수밖에 없는 농민들의 ‘개방농정 철폐, 미국반대’ 주장과 명분은 빛이 바래 퇴색해버렸다. ‘식량의 무기화’ 경고는 낡은 민족주의가 되어 박물관으로 내몰리고 개방은 가속화 되었다. 이런 망할 놈의 신자유주의 편에 선 세상과 80년대식 가투를 벌이는 농민들은 흡사 게릴라 같다. 그래서 내 시는 경고문처럼 쓰여 졌고, 그렇게 읽혔다.

나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 대한 향수로 농민들을 많이 편애해 왔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애정이 한낱 헛된 구호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인 하나 세상이 농민들에게 가한 폭력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공산품 수출을 위해 농업을 사양 산업으로 내몰아 붕괴시키고 농민들을 축출하려는 현재진행형의 그 폭력에 성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지만,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내 시는 그 야만에 대한 항거였다. 그러니까 격문이었고, 게거품이었다. 그래서 울분을 일으켜 부른 내 노래는 지독한 음치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 땅의 시인들에게 묻고 싶다. 아직도 농촌에는 유장한 삶의 물결이 있다고 믿는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당신들 마음의 안식처라고 생각하는가. 태(胎)를 묻은 곳, 늙은 어미가 아직도 장롱 속에 배냇저고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믿지 마시라. 농촌은 이미 죽어버린 끔찍한 풍경이다.

전통농업은 사라지고 쿠데타처럼 획일적인 상업농이 판치는 곳, 농사짓는 일의 즐거움의 노래는 잃어버리고 풍자와 역설이 난무하는 곳, 엄청난 갈등과 모순이 뒤얽힌 농촌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인식의 잣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농민들이 앓고 있는 자폐증과 삶에 대한 무기력이 들녘을 더욱 호전적인 상업농으로 몰아가는 시대상황은, 세계적인 양모 생산지로 유명했던 저 플랜더스(플랑드르)를 연상시킨다.

양모의 자체 생산보다는 영국 모직물의 수입으로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했던 약아빠진 상인들로 인해 생산기반이 파괴되고, 그 기술자들을 받아들인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제패했지만, 그러나 양떼들이 사라진 플랜더스의 황량한 벌판은 생산을 포기하고 무역을 선택한 인간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저 플랜더스의 불행에는 정치/경제적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개입했는데, 우리 농업이 흡사 그 모양을 닮아가고 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경제학자 정운영 선생은 그런 플랜더스를 “빛 바랜 옛 잡지책에서 흘러간 명배우의 사진을 보는 것만큼이나 심란한 비감에 잠긴다”고 썼다. 나는 오늘도 그 글을 꾹꾹, 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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