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요구사항

  • 입력 2009.10.19 10:22
  • 기자명 구점숙 (경남 남해군 삼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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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연세는 72세이시고 허리가 굽으셨지만, 동네에서 힘쓰는 일 외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만치 일 욕심도 많으시고 실제 일도 잘 하신다. 총기도 좋으셔서 100개 이상의 전화번호를 머릿속에 담아두셔서는 필요할 때면 잘도 인출하신다.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의 대소사를 다 기억하시어서는 누구네 집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면 왜 들락거리는 지 죄다 파악하신다. 어디 그뿐인가? 골짝으로 바람이 치불면 비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시고, 구름만 보아도 날씨를 예지하신다. 언제 씨앗을 넣어야 하는지, 언제쯤 수확을 해야하는지 잘도 아신다. 일찍이 가족계획으로 3명의 자식만 낳은 것도 자랑거리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아이를 대책 없이 많이 낳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미련스럽다고 하신다.

그런 시어머니께서 지난 여름부터 몹시 심기가 불편해 하신다. 일단 기력이 쇠약해져서 예전처럼 맘껏 일할 수 없는 것에서부터 화를 많이 내시고, 그러면서 더욱 잔소리가 심해지셨다. 또 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은 어느 누구보다 남부럽지 않았는데, 그래서 늘 당당하셨는데 최근 들어 그 위상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담함을 느끼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축감이 많이 드시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비슷한 규모의 농사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는데, 그 당시 농사지을 땅조차 없던 가난한 사람들은 서럽게 농촌을 떠났지만, 어머니께서는 당당히 농사짓고 살아오셨는데, 그만 그 끝이 이렇게 참담하게 되었다는 것에 억장이 무너지시는 것이다.

게다가 장남을 공부시켰더니 별안간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빌어먹을 농사를 짓고 있으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시겠는가. 그렇게 심기가 불편하신 날은 식전 댓바람부터 목청을 키워서는 엉뚱한 트집을 잡으신다. 논에 물을 안보고 뭐 하냐, 왜 매일 돌아 다니냐, 이장 방송을 착실하게 듣지 않고 뭐하느냐, 돈 세상에 돈이 제일로 중하지, 다른 게 뭐가 필요하냐 등등 내용도 가지가지다.

그런 시어머니께 이것은 당신 탓이 아니라고, 당신은 정말 누구보다 훌륭하시고 너무도 열심히 살아오셨다고, 이 모두는 잘못된 세상 탓이고, 그래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어머니의 참담함은 한국농업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농업의 철저한 희생 위에서 성장한 타 산업이 이제 그 농업을 완전히 죽이고 있다고, 그 증거로 지금 나락 값이 떨어지고 또 어머니와 우리가 하는 어떤 농사도 수지가 맞지 않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들으려 하지 않으신다. 숫제 가로막고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너희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은 안 바뀐다고.

사실 처음에는 당황했었고, 어머님의 말씀 끝에 꼭 무슨 말이 튀어나오고 그래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대응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목소리를 마구 높일 때에는 지적하는 그 무엇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제대로 말하기가 어려울 때는 화를 내시며 엉뚱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기실 어머니의 요구는 간단하다. 매일 나돌아다닌다고 화 내실 때는 어머니의 전용 농사인 콩 수확을 제 때에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씀인 것이고, 세상이 너희들 뜻대로 바뀌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며 악담을 하시는 것도 실은 그리되면 오죽 좋겠냐만 잘 하기 힘들 것이라는 스스로의 절망에 그렇게 거칠게 표현하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실로 어머니의 삶은 존경할 만하다.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오로지 당신 손으로 이 땅의 농업을 유지 발전시켜온 장본인이이며, 어머니처럼 평생을 농사지어온 그 고단했던 삶이 있었기에 오늘도 세상 사람 모두의 입속으로 하얀 쌀밥과 먹을거리가 들어가고 있지 않는가. 어머니의 노기가 뻗칠 때마다 나는 역치시켜서 생각하려고 한다. 어머니 당신의 노고가 그대로 당신께 영광이 되도록 어떻게든 세상을 빨리 바꾸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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