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프다고요? 골치가 아프겠지요

  • 입력 2009.10.12 11:53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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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도깨비 방망이 하나로 권좌에 오른 왕이 있었답니다. 그의 도깨비방망이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백성들은 그가 왕만 되면 땟물이 졸졸 흐르는 가난에서 구해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벌떼처럼 일어서서 그를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되자 도깨비방망이는 그만 아무 쓸모도 없는 나무막대기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도깨비방망이가 능력을 잃어버리자 왕은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었지요.

화가 난 왕은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사기를 쳐서 고혈을 빨아 부를 축적한 무뢰배들을 문무백관에 앉혀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무엇이든 백성들이 반대하는 쪽으로만 정책을 밀어붙이니 마침내 민심이 들끓어 사직은 누란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신하 하나 왕에게 직언을 할 줄 몰랐고 자신들 잇속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가진 도깨비방망이는 그리 별다른 능력을 가진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마술사였고 그의 마술에 현혹된 백성들의 눈이 멀었던 탓이었지요.

이솝우화 한 토막이거나 어릴 적 할머니한테서 들은 이바구도 아닙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영남무림의 한 원로가 거나하게 취해서 대통령을 비아냥거린 말을 제가 실없이 다시 중얼거려 보는 것입니다.

어느 날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가슴 아픕니다!’ 양의 탈을 쓴 국무총리도 말했다는군요.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철면피 장관들도 중얼거렸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런 젠장! 우리는 참 나쁜 국민입니다. 고소영 내각을 비판하고, 4대강사업을 반대하고, 쇠고기 수입 반대 횃불집회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용산참사를 일으켰으니 그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콩가루가 되도록 몸을 나랏일에 내던져 희생을 하시는 지엄한 분들의 가슴이나 아프게 하고 있다니 우리는 참으로 한심한 족속들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상대방의 가슴에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로 전달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파장도 없이 그냥 가슴이 아프다는 말로만 끝이 난다면 그 말은 너무 건조해서 진정성이 없는 것이지요.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을 때에야 물기가 줄줄 흘러내리는 절실함이 느껴집니다. 대통령이고 국무총리고 장관이고 이 나라 위정자들은 걸핏하면 가슴이 아프다고만 합니다. 용산참사가 가슴이 아프고 비정규직 문제가 가슴 아프고 헐벗은 서민들의 삶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앵무새처럼 그 말만 읊조립니다.

숱한 위정자들이 뱉은 그 숱한 말들이 우리 가슴에서 단 한 번도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로는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슴이 아픕니다. 억장이 무너집니다. 애간장이 녹습니다.

그들이 가슴 아프다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는 속된 말로 ‘머리가 아프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머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머리가 아프다는 것은 다른 말로 ‘골치 아파 죽겠다’는 뜻이지요. 골치가 아프다는 말은 ‘귀찮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국무총리가, 장관이, 여야를 막론한 국회의원들이 용산참사며 비정규직 문제며 농업문제며 서민들의 가난에 대하여 제대로 한번 골머리를 앓아보지도 않고서 귀찮다고 냅다 진저리를 칩니다. 버림받은 것들이, 핍박받는 것들이, 가진 것 없는 놈들이 생떼를 부리느냐고 눈을 부라립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에게는 품격 높은 어법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가슴 아프다’는 말은 품격이 있고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품위가 없는 말인가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일반 저잣거리의 부랑배들도 함부로 쓰는 어법이지 고품격의 말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빈 말로만 가슴이 아프지 말고 자주 억장이 무너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억장 무너지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옛날 말에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하라고 강요했다지요.

이명박 정권이 그렇습니다. 자기들은 바담 풍 하면서 왜 우리더러 바람 풍 하라고 협박을 합니까.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따뜻해야 하는 것이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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